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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Feb 02. 2018

의미 있는 삶과 복원력

의미 있는 삶과 복원력    

                                                             김한빈 



 바야흐로 ‘4월 위기설’이 봄꽃 날리듯 분분한 계절이다. 서민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지금 경제 상황은 경기 침체 국면에서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하고 있다. 경기가 활황이라서 인플레이션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가계소득은 증가하지 않고 빚에 눌러 사는 게 우리 서민들의 현실이다. 제2의 IMF가 눈앞에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나온다. 자영업 소상인들은 경기가 과거 외환위기 때보다 못하다고 한숨을 쉰다. 


 한편, 최근 국내 정치적 사태는 비극과 희극의 관계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비극과 희극은 태생부터 다르다. 비극의 주인공은 고귀한 신분인 반면, 희극의 주인공은 평범 이하의 열등한 인물이다. 비극의 주인공이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나거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높은 지위에 오른 비범한 인물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갖는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의 경우 세 딸에게 영토를 분할해주면서 진정한 효녀 막내딸과 아첨꾼 두 딸을 구별하지 못한다. 절대 권력자는 귀에 달꼼한 소리는 듣되 거슬리는 소리는 듣지 못하는 병폐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약점일 수도 있다. 


 대체로 비극의 결말은 파국이다.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심사숙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 요즘 말로 결정장애 증후군이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다 죽어야 결말에 이른다. ‘오셀로’는 자신의 부하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자신을 사랑하는 정숙한 아내를 오해하여 결국 질투심에 사로잡혀 살해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비극의 파국적 결말을 보고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관객들은 신분이 평범한 사람이다. 비극의 주인공에 대해 감정이입이나 투사, 동일시의 정도가 심한 사람은 더할 것이다.


 그러나 희극은 이와 전혀 다르다. 보통사람보다 더 못난 인물이 부정적 현실을 해학과 풍자로 웃기면서 잘 적응하는 이야기 구조이다. 비극과 달리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은 주인공의 태도가 현실에 대해 적절한 거리두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존심도 없고 배알도 없는 듯한 주인공의 처신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웃기면서 잘 헤쳐나간다. 언제나 화해적 결말이다.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하고 자루바지, 모닝 코트에 지팡이를 돌리는 ‘찰리 채플린’은 거지 신사의 분장과 연기로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흥부’가 궁핍한 시대를 견뎌낸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눌러봤자 똥밖에 안 나오는 가난한 삶을 이겨낸 것은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힘과 해학(유머) 덕분이다. 


 금수저를 물고 나온 고귀한 신분을 가진 계층은 불과 극소수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보통사람들이다. 이런 경제 불황의 불행한 시대를 사는 현명한 처신 방법을 희극의 주인공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을 반면교사로 삼고. 속에 내장이 없는 게와 같이 무장공자로 살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존심을 내세울수록 무한경쟁사회에서 오히려 도태되는 게 현실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문제와는 별개다.


 이제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의 아침이 오고 있다. 개발독재시대를 살아온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경제성장의 신화가 가져다 준 물질중심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날 때다.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어온 물질중심적 패러다임으로는 저성장 경제 침체기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궁핍은 가치관 혼란이라는 아노미 현상을 불러온다. 광기에 찬 2차 세계전쟁 시대를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의미 있는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의지만이 인간을 죽음에서 구제해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로고스테라피라는 새로운 정신분석학의 지평을 개척한 그의 충고가 더욱 큰 울림으로 전해 온다.


 오는 5월엔 대선이 있다. 붉은 장미꽃이 활짝 핀 계절엔 리어왕의 어리석음도 오셀로의 의심도 햄릿의 우유부단함도 떨쳐낸 국가 지도자가 선출되어 한국 사회를 강력한 복원력으로 다시 일으키기 바란다. 전철부답(前轍不踏), 앞선 마차가 빠진 웅덩이에 또 빠질 순 없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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