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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22. 2018

‘경설(鏡說)’의 미학

‘경설(鏡說)’의 미학

                                                                         김한빈



 인간의 발명품 중에 두렵고 놀라운 것은 거울이다. 거울을 덮개로 가려두지 않으면 거울의 이면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거울은 불길한 것, 죽음이나 광기나 저승과 연결된 것으로 여겼다. 나르키소스는 연못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사랑하다 죽어 수선화가 된다. 정신분석학에선 이러한 자기 사랑을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모바일 폰으로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겁 없는 종족이다. 거울은 자기나 타자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과장하여 비춘다. 거기에는 결코 자기에 대한 ‘인식’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비대화된 욕망의 얼굴만 비쳐질 뿐이다. 주체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바깥으로 돌려 타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사고의 용어사전’) 현대인은 타자와의 관계 맺기가 좌절될 때 더욱 셀카에 탐닉할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 1930년대 천재 시인 이상(李箱)은 「거울」을 통해 자아 분열의 비극성을 표현했다. 조용한 거울 속에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악수를 할 수 없는 왼손잡이 ‘나’를 발견하고, 현실의 ‘나’와 닮았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한 ‘거울 속의 나’를 제시했다. 거울은 자의식의 세계이면서도 자기성찰과 자기 객관화의 매개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깊은 연민을 노래했다. 자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엔 타자와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고려 후기 대문장가 이규보의 한문 수필「경설(鏡說)」은 ‘거울’이 자신을 비추는 기능보다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먼지가 끼어 흐린 거울을 가지고 보는 거사(居士)에게 손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거사는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꺼린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다. 만일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을 깨뜨릴 것이니, 차라리 먼지 끼어 희미한 것이 더 낫다. 먼지로 흐려진 것은 거울의 표면뿐이지 본래의 맑음이 흐려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잘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그때 맑게 닦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거울을 대하는 사람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대함은 그 희미한 것을 취하고자 함이다.”라고 답했다.


 「경설(鏡說)」은 먼지 낀 거울을 닦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독특한 거사(居士)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처세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교훈적 성격이 강한 글이다. 맑은 거울과 흐린 거울,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옛날 거울을 대하는 사람(성인 군자)과 거사 등의 대립을 설정하여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는 흠결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인데 지나치게 결백하고 남의 단점만을 지적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에 대해 이규보는 날카로운 비판을 보여준다.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거울을 대했을 때 호기심으로 충만한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비로소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다.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만이 볼 수 있다.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타자이다. 타자의 눈은 자신의 거울이다. 자신의 눈은 타자의 거울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대전제 아래 타자의 흠결과 단점만을 환히 비추는 눈(거울)은 건전하지 못하다. 못생긴 사람들이 언제든지 그 거울을 깨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관용과 포용력이 필요하다.


 만약 나르키소스가 먼지 낀 흐린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면 죽음에 이르는 자기애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짝사랑하던 요정 ‘에코’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면 복수극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셀카봉을 든 현대인은 이상(李箱)과 같이 거울 속에 비친 세계에 대해 이질감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윤동주처럼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연민에 빠져볼 일이다.


<오륙도 신문 칼럼  게재> 2018.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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