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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Aug 18. 2019

플라스틱 발효조에서 탄생한 더블 IPA




평소(특히 요즘같이 더운 평소)에는 라거를 즐겨 마시는 편인데도 간혹 독한 맥주가 당기는 날이 있다. 한없이 추운 겨울철에는 차가운 라거를 벌컥벌컥 들이켜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여름에도 하루 종일 몸이 부서져라 힘든 날에는 독한 맥주가 날 유혹한다. 물론 이런 날에는 맥주보다 삼겹살에 소주가 딱이지만, 맥주는 이것저것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간편하게 마실 수 있어 좋다. 이럴 때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고도수의 맥주가 있으니 바로 듀밸 Duvel과 만자니타 Manzanita라는 맥주다. 듀벨은 수입된 지 오래되었고 워낙 유명해서 대형 마트나 맥주 전문 가게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만자니타는 주로 이마트에서 구입한다. 듀벨은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로 분류되는 말 그대로 황금색의 강한 맥주로 ABV가 8.5%이다. 하지만 이 맥주는 매력이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마실 때는 라거처럼 청량감이 있어 술술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은근히 취기가 오른다는 것이다. 이 맥주의 이름이 괜히 악마가 아니다 - 듀벨은 악마라는 뜻이다.


그에 반해 만자니타는 마실 때부터 '이거 센데'라는 느낌이 확 든다. 만자니타의 풀 네임은 트위스티드 만자니타 케이오틱 더블 IPA Twisted Manzanita Chaotic Double IPA로 그야말로 혼돈과 더블의 강력한 맛이다. IPA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IPA에 실망할지도 모르고, IPA를 좋아하는 분들도 더블 IPA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지도 모르겠다. 캐스케이드, 센테니얼, 콜럼버스 등 미국이 자랑하는 3C 홉이 모두 들어가 있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드라이 홉핑을 했다는데 그 신선한 자몽 향과 시트러스함을 어디 가고 오래된 과일에서는 나오는 진득한 맛이 난다 - 물론 오래된 과일에서도 자몽향과 오렌지 향은 배어 있다. 맥주를 처음 양조한 브루마스터가 이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좋은 재료를 썼으니 분명 좋은 맛이 나올 거야. 어라! 근데 맛이 이상한데. 완전 혼돈의 맛이군.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름을 혼돈이라 하자.'라고. 아무튼 나는 이 맥주를 썩 좋은 맥주로 생각하지도 않고 주위에 추천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는 데 이상하게 마트에 가면 하나씩 들고 오곤 한다. 특히나 몸에 구멍이 탱글탱글하게 날 것처럼 힘들 때에는 빨리 이 한 병을 마시고 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앗, 이 맥주 알코올 도수가 무려 9.7%다.




그런데 오늘 하고 싶은 맥주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바로 맥주 이름에 살짝 드러나 있는 더블 IPA라는 스타일을 말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가 아니고 노트북을 펼첬다). 우선 그전에 IPA의 역사를 살짝 살펴보고자 한다. IPA만큼이나 맥주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맥주가 또 있을까 싶다 - 문제는 내가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IPA는 India Pale Ale로 이름에는 인도가 들어가 있지만, 만들기는 영국에서 만들었고, 현재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페일 에일보다 홉과 재료를 충분히 넣어서 알싸하고 쌉쌀하고 진하기로 유명하다.


영국은 1611년부터 동인도 회사를 세워 인도를 식민지화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를 지배하면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고, 원활한 수송을 위해 철도를 건설하여 인도의 차나 향신료 등을 영국으로 보냈다. 인도로 돌아가는 배에는 면제품이나 소고기, 돼지고기 등을 실어 수출하였는데, 이 수출 품목에는 현지의 영국인들을 위한 맥주도 있었다. 맥주는 페일 에일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포터도 있었다. 영국을 출발한 배는 대서양을 지나 적도를 넘고,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다시 인도양의 적도를 넘어 인도에 도착했다. 적도를 두 번이나 건너는 오랜 항해는 장장 수개월에서 6개월까지 걸렸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이 오랜 시간 동안 맥주를 상하지 않게 운송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던 영국의 포터에 홉과 몰트를 두 배쯤 넣어 만든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러시아로 수출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일 에일에 더 많은 홉을 사용하여 알코올 도수를 높인 인디아 페일 에일을 만들었다. 홉은 맥주에 쌉쌀한 맛과 향긋한 풍미를 주기도 하지만 맥주의 보존성을 높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홉은 천연 방부제의 역할을 했다.


IPA를 상업적으로 인도로 수출한 시기는 대략 17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미들섹스 Middlesex와 이섹스 Essex 사이에 있는 보우 브루어리 Bow Brewery의 조지 호지슨 George Hodgson이 호지슨스 옥토버 비어 Hodgson's October Beer라는 이름의 상표를 단 맥주를 인도에 수출했다. 호지슨의 IPA는 1800 년대 초반까지 인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호지슨은 이러한 인기를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동인도 회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인도로 떠나는 선박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러시아에 포터를 주로 수출했던 버튼 온 트렌트 Burton-on-Trent 지역의 브루어리는 러시아 황제가 맥주에 세금을 과하게 부과하여 어려움을 겪자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었다. 호지슨과의 밀월 관계에 배신을 당한 동인도 회사는 버튼의 브루어리에 주목했다. 결국 버튼의 올숍 Allshop 브루어리는 빠르게 페일 에일을 연구하여 자신의 IPA를 동인도 회사의 배에 실을 수 있었다. 이러한 IPA는 버튼의 다른 양조장에도 전파되어 바스 Bass 브루어리나 토마스 솔트 Thomas Salt 브루어리도 IPA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인도로 수출되던 IPA는 점차 영국 본토에서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호지슨과 버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IPA의 시장을 인도에서 영국 본토로 확장하게 된 까닭이었다. 특히 위기감을 느낀 호지슨은 빠르게 영국 시장으로 돌아섰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인도로 돌아온 자들이 인도에서 마시던 맥주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점을 공략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기는 차츰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IPA는 호주와 뉴질랜드와 같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나 미국과 캐나디에도 수출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IPA의 인기는 라거의 출현과 맥주에 대한 세금 정책이 바뀌면서 저물게 되었다. 독일의 제들마이어와 오스트리아의 드레허가 영국의 선진 양조 지식을 배워 만들기 시작한 라거가 오히려 영국의 페일 에일과 IPA의 시대를 저물게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맥주의 세금을 알코올 도수에 따라 부과하게 되면서 도수가 높은 IPA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IPA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미국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였다. 1965년 프리츠 메이텍이 앵커 브루잉을 인수하면서 시작된 크래프트 맥주 정신은 1980년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의 큰 성공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정신은 작고 독립적인 양조장에서 전통적인 레시피를 재해석하여 맥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영국의 페일 에일과 IPA였다. 그들은 미국에서 생산된 신종 홉을 사용하여 열대 과일의 향긋함과 쌉쌀한 맛을 내는 미국식 IPA를 만들었다.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가장 먼저 성공을 거든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의 시그니쳐 맥주도 바로 이 미국식 페일 에일과 IPA이다. IPA는 향후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되었고 미국의 대부분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생산하는 맥주 스타일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수제 맥주 열풍을 전 세계에 불게 하는데 일조했다.



IPA의 알코올 도수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없으나 '맥주상식사전'을 쓴 저자 멜리사 콜은 모름지기 IPA라면 알코올 도수가 6%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인 생각을 밝혔다. 일반적인 페일 에일이 4 ~ 5.5% 수준이라니 명성에 비해 그리 높은 도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블 IPA라면 말이 다르지 않을까? 이름에 더블이 붙었으니 이 스타일 어떨지 상상이 간다 -  트라피스트 맥주에도 더블이 있으니. 물론 트리플 IPA도 있을 수 있다. 혹시나 찾아보니 쿼드러플 IPA도 있다. 이쯤 되면 맥주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다. 더블 IPA는 임페리얼 IPA라고 불리기도 한다. 맥주에 임페리얼이 붙으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는 지난 글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관한 지난 글


더블 IPA에서 유명한 맥주는 미국 크래프트 브루어리 중 하나인 러시안 리버 브루잉 Russian River Brewing Company의 플라이니 디 엘더 Pliny the Elder라는 맥주이다. 멜리사 콜의 설명에 의하면, '가볍게 덤벼서는 안 되는 맥주이며, 다른 맥주부터 마셔서 입맛을 기른 후 차근차근 도전해야 한다'는 맥주이다. 개인적으로도 마셔 본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설명을 대신하지만, 원래 이 글은 맥주의 테이스팅 노트를 쓰려고 한 글이 아니다. 대신 더블 IPA의 탄생 비화를 얘기해 보려는 글이다.


플라이니 디 엘더와 블라인드 피그


러시안 리버 브루잉에서 플라이니 디 엘더를 만든 양조사는 비니 실루조 vinnie cilurzo라는 인물인데 그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코벨 Korbel이라고 하는 브루어리에 고용된 브루마스터였다. 코벨은 양조 사업을 중단하고 양조장을 비니 실루조에게 팔았는데, 이 양조장이 바로 러시안 리버 브루잉이다 - 양조장 인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브루마스터에서 브루어리의 사장이 된 비니 실루조는 마음껏 자신의 레시피대로 맥주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더블 IPA이다. 그런데 비니 실루조가 더블 IPA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고 그의 전 직장이었던 블라인드 피그 브루잉 Blind Pig Brewing에서였다.


1990년대 애리조나의 한 브루어리의 양조사가 마리화나 소지 협의로 체포되면서 그의 모든 양조 시설을 블라인드 피그 브루잉에 팔았다. 당시 블라인드 피그 브루잉에서 브루마스터로 근무하던 비니 실루조는 이 양조 시설을 이용하여 맥주를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발효조가 플라스틱 장비였다. 플라스틱 장비를 사용하면 맥주에 원하지 않는 풍미가 배일 것 같았던 그는 나쁜 풍미를 막기 위해 홉을 두배로 늘리고, 몰트를 30% 정도 더 사용하여 맥주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를 브루어리 설립 1주년 행사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었다. 러시안 리버 브루잉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홉과 몰트를 더 넣고 실험을 거듭하여 만든 맥주가 바로 플라이니 디 엘더이다. 플라이니 디 엘더라는 이름은 홉을 식용 가능한 야생 식물로 처음으로 소개한 1세기 로마의 철학자 대(大) 플라니우스에서 따온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플라이니 더 엘더


'지나치면 독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IPA에 더 많은 홉과 몰트를 사용한 맥주의 경쟁은 지나친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마시는 더블 IPA는 여러 실험을 거듭하고 무한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가끔 온몸이 피곤할 날 정신이 번쩍 들고 싶으면 더블 IPA를 마셔보라고 추천한다.




참고자료


[1] 맥주의 모든 것 맥주의 탄생부터 크래프트 맥주의 세계까지, 조슈아 M. 번스타인 저, 정지호 역, 푸른숲, 2015년 08월 21일

[2] 알면 알수록 맛있는 맥주 상식사전, 멜리사 콜 저, 정영은 역, 길벗, 2017년 06월

[3] 아틀라스 오브 비어 : 전 세계 맥주와 함께 하는 세계 여행, 낸시 홀스트-풀렌,마크 W. 패터슨 저, 박성환 역,  영진닷컴, 2019년 05월

[4] 크래프트 비어 북 :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역사부터 문화까지 크래프트 맥주에 관한 모든 것, 김선운 저, 숨, 2017년 08월

[5] Vinnie Cilurzo of Russian River Brewing Company

[6] Brewer Spotlight: Vinnie Cilurzo, Russian River Brewing Company

[7] Vinnie Cilurzo Co-Owner, Russian River Brewing Company

[8] 러시안 리버 브루잉 컴퍼니 홈페이지

[9] '올드 라스푸틴'을 마실 때 하고 싶은 이야기

[10] 꼭 알아 둬야 할 미국의 크래프트 브루어리

[11] '작고 독립적이고 전통 있는' 미국의 크래프트 브루어리

[12] 듀벨, 이것은 진정 악마의 맥주다.

[13] 라거는 어떻게 전 세계를 점령하게 되었나?


본문 및 제목 사진 출처 : 러시안 리버 브루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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