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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Nov 21. 2018

중세, 맥주에 만취하다

중세 음주 문화의 역사

얼마 전, 음주로 인한 폐해로 술 광고에서 '꿀꺽'이나 '캬~' 소리를 못하게 규제한다는 뉴스(208년 11월 13일 MBC 뉴스)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음주로 인한 폐해를 진단하고 음주 사고를 예방하는 것은 옳다고 보지만, 술 광고에서 음주 장면을 금지해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비약적인 주장이 아닌 가 싶다. 술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 그렇다면 '청소년 문제가 있으니 출산을 장려하지 마라', '운전 사고 문제가 많으니 자동차 광고를 금지하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과음을 한 사람이 문제이고, 그로 인한 사건 사고가 문제이지 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술 광고 자체가 과음이나 음주 사고를 장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의 저자 야콥 블루메는 예전에는 술 마시는 일이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에 술 마시는 것 자체에 힐난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과 사생활이 중시되는 오늘날에는 알코올 과음과 중독자가 늘어났는데, 사회가 술 마시는 일을 너그럽게 바라본다면 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공감한다. 규제는 해야 할 곳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고, 술에 대한 문화는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을 다시 한번 열어 봤다. 중세의 음주 문화가 이 책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음주 문화, 그때라고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보다 관대했을 뿐이다.

https://news.v.daum.net/v/20181113201312279?f=m


중세 대학생의 음주 문화

12세기 볼로냐에 유럽 최초의 대학이 생겨진 이래 대학생의 생활은 공동체가 주도했다. 중세 대학에서 사생활 같은 것은 없었다. 맥주에 대한 온갖 통제에도 불구하고 대학 공동체의 음주 동아리는 무수히 생겨났다. 대학생들의 단체나 향우회도 늘었다. 지금처럼 같은 지역 출신들이 모임을 결성한 것인데 모임 이름도 없고 회칙도 없이 다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늘상 맥주 마시기 경쟁이 벌어지곤 했었는데, 1리터 잔을 단숨에 비우고 경쟁 상대를 지목해 경합을 벌이곤 했다(지금의 파인트 잔이 그때는 1리터 정도 되었나 보다).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즐기는 술 마시기 놀이도 있었다고 한다. 일명 ‘교황 놀이’라는 게임이다. 게임의 룰은 이렇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원형으로 둘러 앉는다. 원형의 가운데에는 큰 대못을 박고, 가운데 구명을 뚫은 나무토막을 대못에 끼운다. 나무토막을 돌려 그 끝이 가르킨 사람이 1리터의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신 대가는 한 계급 상승이다. 처음에는 모두 평민으로 시작해서 술을 마실 때마다 병사, 하사하는 식으로 진급한다. 그 다음은 백작, 후작, 공작, 제후, 왕, 황제로 이어지는 신분 상승을 맛본다. 특이하게 황제보다 더 높은 자리는 대학생이라고 한다. 대학생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추기경이고 마침내 교황의 권좌에 오르면 놀이가 끝난다. 교황에 오른 사람은 1리터 열 두잔을 마셔야 한다. 결국 교황이 만취하고 쓰러져야 놀이가 끝이 났다고 한다. 교황에 오르기 까지 이미 10리터 이상의 맥주를 마셨을 텐데, 교황이 되면 또 다시 12리터를 마셔야 하다니 요즘의 대학생들의 음주는 왠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인다.

중세 여성의 음주 문화

중세에서 맥주를 빚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대체로 여자들이 빚은 맥주가 맛있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의 호론몬에 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많은 호르몬을 배출하고 호르몬이 효모 세포를 분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맥주의 발효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맥주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지대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빵을 굽는 것 뿐만 아니라 맥주를 발효하는 것도 맥주를 공급하고 감독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혹은 게르만족에서도 맥주를 책임진 건 여성이었다. 이런한 풍습은 중세까지 이어졌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여성이 결혼할 때 맥주를 끓이는 큰 솥단지가 혼수 품목이었다고 한다.
중세의 여성들은 남자들 못지 않은 술꾼이었다. 남자들만의 술판과는 다른 여성들만의 술판이 있었다. 남자들이 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셨다면 여성들은 직접 맥주를 빚어 이웃의 여성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여자들만의 또 다른 술판도 있었다. 바로 출산하였을 때 동네 아낙들이 모여 술판을 벌인 것이다. 이른바 출산 축하 맥주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마을의 아낙네들이 모여 거나하게 술판을 벌인다. 이 술판은 산파가 주도하였다. 여성들은 맥주에 흠뻑 취해 거칠게 거리를 휩쓸었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지나가는 남자가 있으면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 남자의 모자가 허공에서 날아 다녔다. 지나가는 마차가 있으면 마차를 세우고 마차 위를 기어 오르기도 했다.

중세 농부의 음주 문화

중세 농부의 공동의 행사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었다. 예를 들어 파종이나 추수, 가축 사육 등의 노동은 마을 단위로 함께 해결했다. 당시에는 노동이 인생이었으므로 여가라고 부를 만한게 없었다. 그런 사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공동체에서 함께 결속을 다지는 것이 중요했다. 공동체에서 결속을 다지는 일로 다함께 맥주를 나누어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일상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 각종 명절과 세례식, 추수 감사 축제와 결혼식에서의 음주는 위 아래가 없었으며 다같이 평등하게 취해 그야말로 불콰해질 수 있었다. 이런 의식이나 풍습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은 만들어 내기 나름이였다. 맥주를 부르는 명칭만 봐도 얼마나 맥주를 마실 계기를 만들어 냈는 지 알 수 있다. 세례 축하연 맥주, 영아 세례 맥주, 출산 기념 맥주. 논밭의 잡초를 뽑아주며 사이 사이 마시는 맥주에도 ‘잡초 맥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문이나 벽에 보수 공사를 하며 마시는 맥주는 ‘창문 맥주’라 하였고, 이웃에 새로 이사 온 농부를 환영하는 ‘새 농부 맥주’, 집을 짓는 건축 공사가 끝나면 ‘완공 맥주’ 등 아무튼 여러 이름을 갖다 붙여 가며 맥주를 마셨다고 한다.

중세 수공업자의 음주 문화

중세 수공업 길드의 문화에서도 맥주는 빠지지가 않는다. 중세 수공업자의 하루는 자신이 사는 집, 작업장, 그리고 길드에서 운영하는 술집이 전부였다. 술을 마시면서 언제 일을 누구와 할지를 결정하였고, 새로운 직공이 있으면 정해진 양의 맥주를 마시게 하는 신고식을 치뤘다고 한다. 도제를 심사하는 자리도 술판이었다. 술판의 목적은 단순히 심사가 엄격함 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일할 도제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도제가 수련을 끝내고 정식 조합원이 되기 까지는 아주 혹독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시련과 시험을 끝내고 정식 조합원이 되는 자리에서 선배가 따라 주는 잔을 단숨에 들이 켜고 머리위로 잔을 거꾸로 들어 올려 맥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 환영의 팡파레가 울렸다.


중세의 음주는 잉여의 삶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음주를 속박하기보단 관대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중세의 음주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일탈이 일어 날수도 없었고,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중세의 술판은 그저 흥청망청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름 생활을 멋지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참고 자료

1.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야콥 블루메 저, 도서출판 따비


사진 출처

https://t1.daumcdn.net/thumb/R1280x0/?fname=http://t1.daumcdn.net/brunch/service/user/4iBN/image/akeW0YZemAleWPxiISb9-UoLsZ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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