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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Nov 12. 2018

한국 맥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 맥주의 역사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 맥주 수입


한국에 맥주가 수입된 때를 막연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료를 찾다가 그보다 5년 전인 1871년에 맥주에 관련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Chief of the village of Roze Island'라는 이름의 사진으로 지금의 인천 월미도의 마을 이장이 맥주병을 안고 있는 사진이다. 신미양요 때 외국군에 의해 유입된 맥주병이라고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의 저자이며 술 칼럼니스트인 명욱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진의 주인공은 마을 이장이 아니라 문정관이라는 직책의 하급관리이며, 햡상을 하러 올라간 미국 군함에서 맥주를 대접받고 빈병을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원래 맥주라는 술은 없었다. 대신 조선왕조실록 영조 대의 기록에 보리로 만든 술은 있었지만 현대의 맥주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최초의 맥주는 결국 수입맥주인 셈이다. 정식으로 한국에 처음으로 맥주가 들어온 시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면서부터이다. 일본으로부터 삿포로 맥주가 처음 들어왔으며, 에비스 맥주, 기린 맥주가 연달아 수입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상류층들 사이에서만 마실 수 있었다. 1910년 서울에 최초로 일본믜 맥주 출장소가 생긴다. 이때부터 맥주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고, 1920년에는 수입 주류 중에서 맥주의 비중이 가장 높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맥주는 일부 부유층의 술로 비싸기만 했다. 맥주 한병의 값이 4~5일 치 식비와 맞먹었다고 하니 대중의 술은 아니었다.


Chief of the village of Roze Island


영등포에 맥주 제조공장 설립


일본은 우리 땅에서 그들의 자본과 기술로 맥주를 생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33년 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에비스 맥주의 합병 회사인 대일본맥주(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주식회사를 설립했다(일본과 조선의 자본 비율이 7:3이었다고 한다). 영등포는 인천에서 배가 들어오기 용이하고, 기차가 다니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그해 12월에는 일본의 기린맥주(주)가 소화기린맥주를 역시 영등포에 설립한다. 이 두 개의 맥주회사가 각각 현재의 하이트맥주(주)와 오비맥주(주)의 전신이다. 여담이지만, 이때의 맥주 양조기술은 기계식으로 되기 이전이라 효모를 양동이에 담아 발효통에 쏟아붓는 식이었다고 하니 대량 생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등포에 지어진 삿포로 맥주 공장, 거꾸로 읽어야 삿포로 비-루하고 읽힌다.


맥주 회사의 민간 불하

세계 대전이 점점 치열한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서 맥주의 생산과 판매는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은 한국에서 수탈을 심하게 했고 곡식에 대한 조달은 어려워져 맥주 생산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맥주를 정상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방 이후 조선맥주와 동양맥주(1948년 소화기린맥주가 동양맥주로 상호 변경), 두 맥주회사는 미군정에 의해 관리되었다. 또한 1949년 주류전매법이 통과되면서 정부가 주류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권한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두 맥주회사는 적산기업으로 1951년에 민간에 불하되었지만, 전란의 피해로 전쟁 중에는 정상적인 공장 가동이 어려웠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두 맥주 회사는 재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가 두 맥주 회사의 경쟁의 시작이며, 우리나라 맥주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적산(敵産) : 귀속재산(歸屬財産)이라고도 하며, 미군정 법령에 의해 미군정에 귀속된, 국 · 공유재산 및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 출처 : 위키백과


주세는 국가 재정의 주요한 재원


처음 맥주가 들어온 이후 한국의 정세는 한 번도 안정적인 적이 없었다. 개항과 일점 강정기,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그리고 정권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때마다 국가가 가장 먼저 국민의 세수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 주세였다. 따라서 국가가 중점적으로 관리해야 할 산업의 하나가 양조업이었다. 1950년 대 세금을 가장 많이 냈던 3, 4위 기업이 동양맥주와 조선맥주였다고 한다. 맥주는 이런 상황에서 성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맥주의 맛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웠다. 516 군사 쿠데타는 음주계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고급 요정이 대폿집이나 대중 식사점으로 전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데타 이후 요릿집은 1/3로 줄어든 반면, 대폿집은 세배나 늘었다. 주류 소비량은 쿠데타 이후 네 배나 늘었다. 하지만 늘어난 술은 대부분 탁주나 약주였다. 맥주는 오히려 반이나 즐었다.


이젠벡 맥주, 잠깐이었지만 맥주의 삼국시대


197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체 주류 시장에서 맥주보다 탁주의 비중이 높았다. 탁주가 5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반면, 맥주는 6 퍼센트에 불과했다. 맥주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1970년 대 후반이다. 수출 100역 달러 달성과 중동 건설 경기 호조로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맥주 소비도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맥주 시장의 양강 체제에 '이젠벡'이라는 맥주를 들고 한독맥주가 탄생한 사건이다. 1973년 6월 한독맥주는 독일의 이젠벡(Isenback) 맥주와 기술 제휴를 맺고 마산에 공장을 세우고 1975년부터 국내 판매를 시작하였다. 공격적인 마케팅,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하여 양강 체제에 균열을 만들었다. 당시 맥주 점유율이 오비맥주가 51.7 퍼센트, 크라운맥주가 32.9 퍼센트, 이젠백 맥주가 15.4 퍼센트였다고 하는데. 제품 출시 3개월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한독맥주는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 주권과 수출계약서를 위조하는 등 불법적인 사기행각으로 대표가 구속되었고, 1976년 8월 상장을 통한 투자유치의 실패로 부도를 낸 후 이듬해 조선맥주에 흡수되었다. 잠깐 있었지만 한국 최초의 맥주삼국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제부터는 이젠벡입니다. 이젠벡 맥주
맥주의 거품을 꽃으로 묘사한 '이젠벡' 맥주


80년대, 동양맥주의 시대


1980년대에 들어 맥주의 소비량이 점점 증가하였다. 1987년 기점으로 맥주의 출고량이 탁주를 추월하였으며, 1989년 맥주의 비중이 전체 주류의 45 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맥주가 대중주로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대량생산 체제가 갖추어진 영향이 크다.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추어 지기 이전에는 여직원들이 병맥주 속의 이물질이 있는지 하나하나 검사했는 가 하면, 주사기처럼 생긴 주입기를 들고 병맥주에 맥주를 채웠다고 한다. 그러다 점점 맥주 제조 공장이 자동화되었고, 자동주입기기를 사용해 자동으로 맥주통에 맥주를 담게 되었다.   술 칼럼니스트 명욱은 80년 대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맥주의 황금색과 거품이 맥주의 마케팅에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전에는 고급술이라는 이미지였지만 당시의 광고에서 '회식자리에서 즐기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더욱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시장점유율은 동양맥주가 70퍼센트, 조선맥주가 30펴센트 정도였다. 조선맥주의 30퍼센트 마저도 동양맥주의 독과점을 우려해 일부러 시장을 양보한 덕택이라고 한다.

회식을 주제로 한 OB 맥주 광고


90년대, 페놀 유출 사건과 그 이후


1990년 대에 들어서는 맥주 시장에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1991년도에 발생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93년 진로의 맥주 시장 진출이다. 낙동강 페놀 사건이란 1991년 3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의 낙동강에서 30톤의 페놀 원액이 유출되어 상수원을 오염시킨 사건이다. 국회에서는 진상 조사위원회가 열렸고, 각 시민 단체는 수돗물 오염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시민들은 두산 제품을 불매하기 시작하였다. 두산 전자는 조업 정지를 당했으나 페놀 사고가 단순 과실로 고의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조업을 재개한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22일 또다시 페놀이 유출되는 2차 사고가 발생하여 국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다다른다. 결국 두산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환경부 장차관이 경질되었다. 페놀 사건으로 인한 OB맥주 불매 운동으로 조선맥주는 반사 이익을 얻게 된다. 사실 아직까지 잘못 알려진 점이 페놀 유출 당사자가 OB맥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OB맥주로서는 두고두고 억울한 일이다. 두 번째 큰 사건은 부동의 소주 1위 기업인 진로의 맥주 시장 진출이다. 한독맥주 이후 두 번째 맥주 심국지 시대를 맞는다. 진로는 미국 쿠어사와 합작하여 진로쿠어스를 세우고, 소주시장에 축적한 노하우와 유통망을 바탕으로 카스 돌풍을 일으켰다. 조선맥주는 페놀 사건 이후 지하 150미터 천연암반수로 만든 하이트 맥주를 출시했다. 당시 하이트 맥주병에는 맥주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온도를 표시하는 온도계도 있었다. 또한 국내 최초로 효모를 열처리가 아닌 마이크로필터로 걸러냈다. OB맥주는 하이트 맥주와 카스의 협공을 받으며 휘청거렸으며 하이트 맥주는 승승장구했다. 이 사이 대세의 흐름은 뒤바뀌었다. 1996년 시장점유율에서 하이트맥주가 43 퍼센트를 기록하고 드디어 동양맥주를 꺾었다. 2006년에는 60 퍼센트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98년 조선맥주는 아예 사명을 하이트맥주로 변경한다. 반면 동양맥주는 사명을 오비맥주로 바꾸고, 신제품 라거를 출시하며 기회를 노렸지만 뒤집기는 실패한다(결국 뒤집기는 카스로 이뤄내긴 한다). 결국 두산그룹은 맥주 사업을 철수하면서 지분을 벨기에의 인터브루에 매각한다. 이 인터브루가 지금의 앤호이저-부시 인베브로 발전하였다. 경영난에 허덕인 진로쿠어스는 1999년 오비맥주에 인수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맥주 회사인 진로쿠어스는 오비맥주에 인수되지만, 소주 회사인 진로는 하이트맥주에 인수된 다는 것이다. 지금의 하이트진로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카스는 세계 1위의 다국적 맥주 기업인 앤호이저-부시 인베브를 소유한 벨기에 맥주가 되면서 2012년 시장점유율 1위를 재탈환한다. 2014년에는 롯데주류가 홉을 강조한 라거 맥주인 클라우드(Kloud)를 출시하면서 세 번째 국내 맥주 삼국지를 완성한다. 그럼 현재의 시장점유율은 어떨까? 2018년 글로벌 리서치 회사 유로모니터의 조사에 의하면,  2017년 국내 맥주 시장은 카스가 45.8%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로 하이트가 17.3%, 맥스가 7%를 차지하고 있다. 클라우드는 3.8%를 차지하고 있는 걸로 나타났다. 참고로 발포주인 필라이트는 2%이다.


현재, 수입 맥주와 크래프트 맥주의 시대


현재의 국내 맥주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수입맥주의 비중이 늘었다는 점. 둘째,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성장했다는 점. 셋째, ‘필라이트’와 같은 발포주가 안착했다는 점이다.

2017년 국내의 수입맥주의 비중은 10.6%에 달하는데 2012년의 3.1%에 비하면 5년 만에 세배나 성장한 것이다. 2018년도인 현재는 비공식적이지만 20%에 가깝다고 한다. 편의점의 판매 비율은 수입맥주가 국내 맥주를 역전해 약 6:4의 비율이라고 한다. 수입 맥주의 브랜드별로 보면 아사히가 2.1%, 칭다오 1.5%이며 다음으로 호가든, 버드와이저, 칭다오, 삿포로 순이다. 그래서인지 국내 3대 주류 업체는 제품 개발보다 맥주 수입에 열중이다. 오비맥주는 버드와이저, 호가든, 스텔라 아르투아 등 본사인 AB InBev의 주력 브랜드를 판매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 산토리 맥주를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롯데주류는 블루문, 쿠어스 라이트 등 밀러를 공식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기린, 싱하, 호주 맥주 포엑스 골드를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라거 맥주 일색(국내 맥주 중 96%가 라거)인 국내 맥주 제조 회사들이 질 좋은 제품,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기보다 맥주 수입에 열중이라니 홉맛처럼 씁쓸하다.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 또한 무섭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2013년 55곳이었던 국내 수제 맥주 업체는 주세법 개정 이후인 2015년 72곳, 2016년 81곳, 2018년 95곳 등으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어 올해에는 약 120곳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세법 개정 이전에는 양조한 시설에서만 직접 팔 수가 있었는데, 2018년 주세법 개정 이후부터는 일반 유통이 가능해져 대형마트, 편의점에서도 판매를 할 수 있다. 대동강 페일 애일, 제주위트애일, 강서맥주, 달서 맥주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필라이트'의 출현은 흥미롭다. 필라이트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어떻게 이 가격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낮은 가격의 비밀은 맥아 비율에 있다. 맥아의 비율이 낮아 일반 맥주가 아닌 발포주의 낮은 주세가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국내 맥주는 얼마나 맥아 비율이 낮길래 발포주에 비해 그리 뛰어난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일까? 국내에서는 맥아의 비율이 10% 이상이면 맥주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예전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66.7% 이상의 맥아를 써야 맥주의 분류에 속했지만 1999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10%로 조정된 것이다. 또한 이 비율은 물을 제외한 원료에서 맥아의 비율이다. 한마디로 몰트 100%인 올몰트 맥주도 물의 비중이 얼마만큼인가에 따라 충분히 싱거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필라이트로 대표되는 발포주는 맥아 비율을 낮추고, 알코올 도수는 맥주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참고로 롯데주류에서 나온 피츠는 소맥용 맥주를 타깃팅으로 나왔지만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 같다. 발포주는 아니다.


출처 : 오비맥주(주) 홈페이지

오비 맥주 주요 연혁

• 1933년 12월 : 소화기린맥주(주) 창립
• 1948년 2월 : 동양맥주(주)로 상호 변경, 상표를 오비맥주로 변경
• 1952년 5월 : 민간기업 동양맥주(주) 창립
• 1995년 3월 : 오비맥주(주)로 상호 변경
• 1998년 9월 : 벨기에 인터브루와 합작사 설립
• 1999년 12월 : (주)진로-쿠어스맥주((주)카스맥주) 인수


출처 : 하이트진로(주) 홈페이지

하이트진로 맥주 주요 연혁

• 1933년 8월 : 조선맥주(주) 설립
• 1948년 : 상표를 크라운맥주로 변경
• 1952년 6월 : 민간기업 조선맥주(주) 창립
• 1993년 5월 : 조선맥주(주) 하이트 출시
• 1998년 3월 : 조선맥주(주) 사명을 하이트맥주(주)로 변경
• 2005년 7월 : 하이트맥주(주)가 (주)진로 인수
• 2011년 9월 : 하이트맥주(주)와 (주)진로 통합, 하이트진로(주) 출범



참고 자료

1. <맥주, 문화를 품다>, 무라카미 미쓰루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2. 냉장고가 없던 시절, 맥주는 어떻게 보관했을까? 


제목 사진 출처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75ED0474EB34E5A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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