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아동센터에 가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피아노 치기다. 원래 센터에 도착한 아이들은 삼십 분 동안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는 등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에 놀 수가 있다. 난 집중 시간에 피아노를 치는 걸로 정했다. 악보는 보지 않고 내가 치고 싶은 곡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건반을 누른다.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면 세상에 있는 많은 곡을 내 것처럼 연주할 수 있어."
처음 나한테 손가락 번호랑 음계를 알려준 사람은 엄마다. 내 첫 번째 피아노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거나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도 번개처럼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서 한두 곡을 연주하곤 한다. 같이 앉아 있다가 엄마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킬 때 난 처음엔 좀 놀랐었다. 그게 피아노 치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놀라지 않고 그냥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우리 학교 3학년 한준이 형도 1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는데, 엄마랑 한준이 형은 실력이 비슷하다. 하지만 엄마는 어른이고 한준이 형은 초등학생이니까 한준이 형이 더 잘 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난 지역아동센터에 한준이 형이 온 날이면 터키 행진곡이랑 바다가 보이는 거리를 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한준이 형은 흔쾌히 경쾌한 연주를 들려준다. 나처럼 외워서 치지 않고 악보 속 음표들을 꼼꼼히 들여다봐가며 연주를 하는 모습이다.
연주가 끝나고 형은 건반에서 손을 뗀 뒤 다시 악보들을 모아 바닥에 대고 툭툭 쳐서 정돈했다.
"이거 빌려줄까? 악보 볼 줄 알아?"
"아니. 조금밖에 몰라."
사실 난 아예 모른다.
"악보를 볼 줄 알면 다 칠 수 있어. 연습하면."
"난 악보 보는 게 귀찮고 내 마음대로 치는 게 좋아."
난 잽싸게 피아노 의자를 당겨 앉아 건반에 손을 얹고서 내 연주 실력을 보여 주었다. 썸머랑 샌즈 주제곡 두 곡은 내가 2학년 중에서는 제일 잘 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다.
"하진이 잘 친다."
내가 연주를 마치자 한준이 형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 악보를 챙겨 넣고 이제 피아노 학원 갈 시간이라고 하면서 떠났다. 한준이 형이 가고 나니까 피아노를 더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는 그냥 한서랑 젠가를 하고 놀았다.
피아노 치는 건 재미있는데 악보 보는 공부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한준이 형이나 엄마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 멋진 곡을 치고 싶다. 엄마는 저번에 나랑 하윤이한테 '이 곡 한 번 들어 봐.'라고 하고는 처음 들어 보는 곡을 아름답게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걸 듣고 있으면 가슴에 식초를 부은 것처럼 시어졌었다. 하윤이는 듣다가 그냥 다른 데로 갔지만 나는 엄마가 마지막 한 음을 치고 이내 소리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그걸 들었다. 그리고 곧장 자리를 바꿔서 엄마한테도 내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엄마는 내 연주를 듣고 가슴이 시어졌다고 감탄하거나 아름다워서 심장이 쿵쿵 뛴다고 하지는 않았다. 웃으면서 박수를 쳐 주긴 했지만 내 기분은 되게 찝찝했다. 난 감동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진아, 당연해. 원래 공부는 재미가 없어. 근데 머릿속에 그 지식을 넣고 나서 다시 피아노를 치잖아? 그럼 전하고 확실히 다르게 손가락이 움직여. 내 눈도 다른 걸 보게 돼. 진짜야. 그러니까 꾹 참고 일단 배워 봐."
엊그제 엄마가 '피아노 이론 첫걸음 1단계'라는 공부책을 사다 주었다. 난 감동을 주고 싶은 거지 악보 읽는 법을 배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엄마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 책을 펼쳐 보았다.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악보를 볼 줄 알면 감동을 줄 수 있어?"
"그거는... 꼭 그렇지는 않아. 세상에는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래도."
아는 게 낫지, 하고 엄마는 자신 있게 얘기했다.
그 말은 왠지 틀린 말처럼 느껴졌다. 감동을 주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었더라면 열심히 읽고 배웠을 것이다.
엄마는 내 불평을 듣고서 하하 웃었다.
"그런 비결을 단숨에 알려주는 책은 거짓말 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