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5

회색 집

by 말린

가끔 회색 집 생각이 난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오기 직전에 살았던 집이다. 밖에서 봤을 때 딱 회색이고 네모난 4층 건물이었다. 우리 집은 1층이어서 4층까지 올라가 본 적은 거의 없다. 이사 왔을 때 시루떡 봉지를 집마다 걸어 놓고 오라고 엄마가 시켰을 때 빼고는.


회색 집에 살 때는 보드를 매일 탔다. 어린이집이랑 편의점 갈 때 타고, 주말에 집 근처 공원에 갈 때는 내가 킥보드를 타고 앞서가면 엄마랑 하윤이가 뒤에서 따라왔다. 해가 지면 킥보드에서 내려 끌고 다녀야 했다. 차가 많아서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마 말로는 우리 가족이 뚜벅이라고 했는데, 그건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자동차 없는 생활이란 뜻이 더 크다고 했다.

"자동차 탈 일이 지금은 별로 없잖아. 전철이랑 버스랑 기차 타고 가면 되니까."

"근데 우리도 차 있었잖아. 전에 아빠랑 엄마랑 나랑 하윤이랑 넷이 같이 살 때."

"응. 그 자동차는 엄마랑 아빠랑 이혼할 때 아빠가 가져갔어... 아빠한테 더 필요해서."


근데 그 순간에 난 그 말이 목에 탁 걸린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귀로 들었는데도 목이 아팠다.

있어야 좋고, 있어야만 하고, 없어서는 정말로 어렵고 힘들어지는 그런 것이 뭔지를 떠올리라고 하면 아빠는 자동차를 떠올렸던 걸까?

"아빠는 왜 차가 필요했어?"

그때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도 지금은 자동차가 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던 날에 선물 받은 차다. 덕승 할아버지가 물려주셨다. 덕승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빠다.


그때, 곧 회색 집을 떠나 이사를 갈 거라고 엄마가 말했을 때 나는 기분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전에 두 번 이사를 해 본 경험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어차피 내가 이사 가기 싫다고 말해도 가게 될 일이었다. 엄마는 이번엔 진짜 오래 살 곳으로 이사를 가는 거라고 힘주어 말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이사를 가면 좋은 거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좀 오래 생각하다가 말했었다.

"좋게 되려고 노력해야겠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또 이사를 가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등으로 가져가 긁어 주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를 많이 해서 왜 미안해?"

"이사 한 번 하고 나면 되게 피곤하니까."

"난 안 피곤하던데."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낄낄 웃더니 다시 등을 구석구석 긁어 주었다. 등이 아주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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