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엉뚱한 자서전
#6-2. 에피소드를 이어서 쓰자면,
내가 13공수 72대대에 전입을 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장님이 새로 부임하셨다. 모 준장. 바로 중위 때 전방대대에서 탈영병을 잡았던 그 사건 직속 연대장이셨던 분이다. 오, 대박.
부임 그다음 주 여단 체육관에서 여단 전 장병을 모아놓고 여단장님 정신교육이 있었다. 나는 조금 늦게 가는 바람에 체육관 거의 끄트머리 쪽에 자리했다. 여단장님 말씀이 이어졌다.
"(중략)... 내가 준장(★)이니까 군생활 한 30년 했거든. 군생활 30년 정도 하면 여러 부대를 왔다 갔다 하는데 보통 새로운 부대에 가면 간부들 중에 못해도 한두 명은 아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엊그제 간부들 사진들을 쭈~욱 훑어봐도 아는 얼굴이 전혀 없는 거야. 그런데 딱 한 명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는데 H. M. G. 혹시 여기 있나?"
내가 뒤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친구가 중위 때 내가 연대장을 했는데 탈영병을 잡았어. 대단한 놈이야."
그날 이후로 우리 대대장님은 여단 올라가실 때 항상 여단장님 오늘은 어떠시냐고 나한테 묻곤 하셨다. 로열패밀리가 이런 건가 싶었다.
#7.
장교들이 특전사를 가는 루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차출, 다른 하나는 지원. 나는 후자다. 내가 특전사를 지원한 이유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물론 당시에 여자친구(지금은 와이프가 된)에게는 차출됐다고 전략적 거짓말을 했더랬다. 차출되면 안 갈 수가 없는 거니까.
나는 학군장교 2년 4개월에다가 군장학생 4년간 장학금을 받았으므로 총 6년 4개월을 의무복무해야 했다. 그리고 야전 중대장으로 가기 전에 다시 병과학교에서 OAC(Officer Advanced Course, 중대장 또는 대위로서 임무수행에 필요한 군사교육과정, 고군반이라 한다) 교육을 받는 도중 중대장으로 부임할 부대가 결정되는데, 그 사이 특전사는 차출되거나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물론 차출되면 무를 수 없고, 지원해서 떨어지면 기회가 없다. 얄짤없이 일반 야전부대로 가야 한다. 나는 장기복무자가 아니라 연장복무자다 보니까 중위 때 탈영병을 잡은 이듬해(2007) 후방으로 인사교류가 있었다. 그래서 전방에서의 근무기간을 꽉 못 채웠던 것으로 알고 있어 중대장은 무조건 전방사단으로 가게 될 것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역할 거 전방에서 철책과 대치하며 전역 준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같은 남은 기간을 특전사를 가게 되면 특수부대를 나왔을 경우 특수직업군(소방구조, 경찰특공 등)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이 그 첫 번째, 그리고 특전사는 간부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로서 한 개 중대가 많아야 12명 정도이므로 작전이나 훈련 등이 좀 더 중대장 중심으로 자율적이라는 점(물론 책임도 당연히 그만큼 크다)이 두 번째, 나머지 세 번째는 무엇보다도 뛰고 쏘는 체력과 사격에 자신 있다는 점이 특전사를 전략적으로 지원한 가장 큰 이유였다.
특전사 지원이 합격하고 나서 OAC과정 중에는 일과 후 맨날 뜀박질만 했다. 달리기로는 누구에게도 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출되거나 지원(합격)한 동기들 중에 육사나 3사가 아닌 나처럼 비사관학교 동기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특전사를 가더라도 공수교육을 '또' 받아야 한다.
우리 OAC 특전사반 동기중 13여단은 두 명이었는데 둘 다 72대대 같은대대로 가게 됐다. 2중대장 J, 11중대장인 나. J는 3사 출신이라 공수교육이 필요 없었지만 나는 전입 오자마자 다시 3주간 공수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공수교육 700기.
특전부사관 기수랑 같이 받았다. 5명의 여군 특전부사관도 있었다, 전부 707이라는. OAC 특전사반 비사관출신 동기들도 여럿 있었다.
공수교육은 총 네 번의 강하를 해야 왼쪽 가슴에 공수휘장을 달 수 있다. 기구 2회(열기구 같은), 시누크 헬기 1회, 항공기 1회다. 오히려 실제 강하보다 강하기술 연마와 체력단련이 더 힘든 게 사실이다. 4월경이었으나 땀은 한여름의 비오듯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특전사의 상징과도 같은 공수휘장을 그토록 염원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간절함이 닿은 건지 200여 명 700기에서 뜻깊은 사령관(★★★) 최우수 상장을 수여받았다. 자랑스러운 13여단 흑표동상에는 여전히 그때 나의 상장 동판이 새겨져 있다.
#7-1.
특전사에는 세 개의 메이저 경연대회가 있다. 하나는 탑팀(Top-Team, 특전사 최고의 팀), 다른 하나는 항공화력유도, 나머지 하나는 KCTC(실전 같은 야전전술훈련)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중대는 대대대표로 2010년 항공화력유도(일명 항폭, 전시에 적군 지역에 침투한 특전사 팀이 중요 목표 지점 등 폭파를 위해 아군의 전투기를 불러들여 항공화력을 유도하는 임무) 경연대회 출전 명령을 부여받았다. 아니, 장기복무자도 아닌 내게 왜 이걸 나가라고 하는 거지?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지역대장(소령)을 찾아갔다.
“장기복무 중대장에게 양보하면 안 됩니까?”
우리 지역대가 항폭 실력이 타 지역대보다 우수해 작년에도, 올해도 대표로 나가는 것이라며 군대는 상명하복이어서 항명을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여. 그런데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이론 및 장비 교관들을 섭외해서 팀원들에게 1:1 교육을 붙였다. 어느 정도 실력이 붙기 시작했는데, 고3 때 수능 공부할 때도 보면 초반러시 때는 성적이 쭉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일주일 뒤부터는 처음의 열정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 느낌이었다.
고육지책으로 두 가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야간 경계작전 근무 조정과 MT였다. 특전사는 간부로 이루어진 부대다 보니 주둔지 경계작전도 간부들이 근무조를 짜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근무조가 걸리는 날엔 야간에 두 번씩이나 경계근무를 서야 해서 주간 훈련에 열중하기에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지역대장님께 우리 중대는 야간 근무에서 아예 빼달라고 건의드렸다. 아무리 근무라고 하더라도 경계작전도 평시 작전이어서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단칼에 불허하셨다. 그리고 훈련 성과가 정체기라 중대끼리 단합 대회가 필요하니 주말을 이용해서 1박 2일로 MT를 다녀와도 되는지를 추가로 건의드렸다. 당연히 까일 줄 알고서도 팀원들에게는 "중대장이 책임질 테니 한번 믿어보라."라고 1%의 기대감이라도 불어넣어 주었다. 결과는 당연히 까였다. 그런데 중대장으로서 한번 뱉은 말에 체면이 아니어서 다음날 한번 더 찾아갔다. 당연히 또 답정너였다. 삼고초려라고 최소한 삼세번은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호흡을 가다듬고서 오후에 한번 더 찾아갔다.
"지역대장님, 허락해 주십시오!"
"좋다. 경계작전은 어떻게 조정해 보겠는데, MT는 음주하고 놀면 사고 칠 우려가 있으니 안된다."
"지역대장님, 대대 대표로 나가는데 예선에서 떨어지라고 나가라는 거는 아니잖습니까. 이왕 나가는 거 원하시는 게 우승 아니십니까. 우승할 테니 보내주십시오!"
"('오?! 의지가 대단한데?!'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았다ㅋ.) 좋아. 대신 술 먹고 사고 치지 말고 중대장이랑 담당관이랑 이동할 때 실시간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단결!"
"얘들아, 지역대장님이 허락하셨다."
"와~ 대박! 중대장님, 그럼 저희 이번 주 MT 가는 겁니까?"
"ㅇㅇ. 중대장 차랑 담당관 차에 나눠 타고 가서 훈련이고 나발이고 실컷 술이나 먹고 놀다 오자!"
"옛, 썰!"
MT를 다녀온 덕분인지 근무가 빠져서 그런 건지 그다음 주부터는 차츰 실력이 다시 붙기 시작했고, 팀원들의 열의도 한층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고비는 대회 바로 3일 직전 정도에 찾아왔다. 거의 99% 실력에 컨디션 조절도 괜찮게 해 왔는데 마지막 1%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고참 중사가 있었다.
"중대장님, 그런데 중대장님은 장기중대장도 아닌데 왜 대표로 나가라고 하신답니까?"
"그건 뭐 어차피 지나간 얘기고, 내가 장기가 아니어도 너희들 중에는 장기복무자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이거 우승하면 자력점수가 상당하니까 우승 한번 해보자. 중대장이 예선 통과하면 100만 원 쏜다!"
"진짭니까?"
"오브 코~~ 올스!"
대회 당일.
우리 팀은 나 포함 전부 11명이었는데, 참가인원은 최소 10명이면 가능하다고 해서 팀원 중 가장 실력이 오리무중이었던 C하사를 전격적으로 당일 아침 배탈이 난 걸로 해서 열외를 시켰다. 10명만 특전교육단에 출정했고 예선을 치르고 나오니 전부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거렸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우리 부대는 충북 증평이라 경기도 광주의 특전교육단과는 한 시간 이상 거리차이가 있었다. 대대에 돌아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는데 교육단으로부터 예선을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단 예하 각 대대대표들 총 24개 팀이 참가해서 예선 성적 상위 4개 부대만 결선행이었는데 우리 팀은 공동 3위였고 총 5개 부대가 예선을 통과했다고 했다. 그런데 결선일은 다름 아닌 다음날 새벽 5시 출발, 강원도 평창이라는 것이었다. 예선 통과를 축하할 시간은커녕 결선은 실제 작전처럼 팀 편제장비를 전부 가져가야 했기에 점오 전까지 군장검사 하기에 더 바빴다. 마지막 군장검사 전 내가 한마디 했다.
"여기까지 온 거 까지껏 내일 우승해 버리자! 내일 우승하면 지난번 예선통과 100만 원에다가 100만 원 더 얹는다!"
"중대장님, 진짜 쏘실 겁니까"
"장교는 거짓말 안 한다!"
다음날 새벽 5시.
여단에서 버스를 지원해 줬고, 대대 앞에서는 대대장님과 주임원사, 그리고 작전과장님, 우리 지역대장님, 행보관까지 도열해서 파이팅! 해주셨다. 어두컴컴 새벽녘 4시간을 달려 강원도 평창 산기슭에 모였고(강철부대 미션 장소 같은) 장비 점검 후 곧장 각 팀에 미션을 하달했다. 우리 팀은 정작부사관이 P중사였는데, 다행스럽게도 J대 영문학과를 재학 중 입대하는 바람에 영어에 능숙했다. 실전은 전투기 조종사랑 영어로 통신해야 하기 때문에 한결 유리했다. 결선은 실제 우리나라 공군 F-15K 전투기 두대를 목표 타깃 지점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이었다. 어느 팀이 가장 정확하게, 가장 빠르게 전투기를 불러들이느냐에 따라 순위가 매겨졌다.
결선을 무사히 치르고 긴장이 풀려 복귀 버스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니 벌써 부대에 도착했고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중대에서 챙겨간 장비랑 군장을 해체하고 있는데 지통실에서 연락 한통이 날아들었다.
‘우승’이란다.
막사가 떠나갈 듯 괴성과 환호를 지르며 팀원들끼리 뜨거운 허그를 나눌 새도 없이 대대장님 호출이 있었다. 11중대원 전부 여단 회관으로 집합하라고 하셨다. 항폭 우승 기념 삼겹살 파티가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3박 4일 포상휴가를 받았다.
우리는 포상휴가를 받자마자 퇴근과 동시에 증평시내에서 모였다. 내가 100+100만 원 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선&결선에 열외 했던 C하사도 포함이다.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소고기집으로 향했다. 쏘맥으로 건배하고 배 터지게 먹였다. 특전사라 그런지 고기도 술도 밑 빠진 독처럼 마셔댔다. 2차는 노래방. 남자들끼리 뭔 노래방이겠냐만은 그날은 우리끼리라도 씐나 칭얼대고 흔들어댔다. 현금으로 뽑아온 신사임당지폐 20장을 흩날리면서 말이다.
#7-2.
강철부대 ‘박군’, 한잔해 한잔해~ '박군'과는 같은 대대에서 근무한 전우다. 11중대장으로 전입 왔을 때 박군은 3중대 중사였고 이미 한해 특전사 Top-Team을 한 중대였다. 특전사는 1개 대대에 15개 중대가 편성돼 있고 같은 건물에 각 중대 내무반이 있어서 가다 오다 대대훈련 간 일상적으로 마주쳤었다. 그 박 중사가 박군이 되었다. 나는 몇 해 전 강철부대2에 지원했었다. 지원서 자소서 제목도 ‘강철부대1은 박군, 강철부대2는 M.G.’
상체 벗은 몸 사진을 부착해야 했는데 아직 식스팩은 선명해서 혹시 모를 기대감이 있었지만 tv에 나온 출연자 면면을 보니 갓 전역한 친구들을 선발했더라. 와이프가 한마디 더 거들어줬다.
“자기가 나갔으면 참호격투에서 누구한테든 들려서 패대기 쳐졌을 거다.”
#7-3.
전역 D-6개월을 앞두고 우리 대대가 레바논 동명부대 파병부대로 결정 났다. 그런데 나는 전역예정자라 파병 갈 수 없다고 했다. 특전사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던 숨겨온 이유 중 네 번째는 '파병'이었는데 이를 경험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국방부에 직접 문의를 했다. 감히 대위 따위가.
전역예정자일 경우 파병을 가려면 최소한 전역 전 기간이 1년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6개월도 채 남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파병기간이 6개월인데 파병 가서 전역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이따금씩 국방일보 등 사회면 뉴스에 전역예정 장병이 큰 훈련을 앞두고 전역을 일정기간 미루는 선의의 결정을 하는 사례를 봤었기 때문에 나 역시 가능할 줄 알았다. 파병 다녀오자마자 일주일 정도 뒤에 멋들어지게 전역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장교는 그게 안 됐었나 보다. 지역대장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파병 같이 가려면 (전역을) 1년 연장하고, 아니면 잔류해라."
나는 하루 정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전역이 코앞 6개월이 남았는데, 파병을 가고 싶다 하더라도 복귀하면 7월 초라 거의 1년을 더 근무해야 하는 것이 맘에 걸렸다. 전역은 6월 30일. 결국 파병을 포기하는 대신 나중에 tv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감정이입이자 대리만족하는 걸로 퉁쳤다. 송중기가 꼭 나였던 것 마냥.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서른에 전역하나 서른하나에 전역하나 그게 그건데 파병을 갔었어야 했나 참 아쉬운 지점이긴 했다, 나 같은 라이프스타일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