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 다운 길

질풍가도

82년생:엉뚱한 자서전

by 아이히어iHea

#9.

2011. 7. 4.

D사 인사팀에 입사했다. D사는 일본 S사 한국자회사(B2B)이다. 면접 당시를 떠올려본다.

그래도 K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기에 군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기술직군으로 가고 싶어 기술직으로 지원했다. 장교 모집군도 있었고 일반 대졸 모집군도 있었는데 서류를 통과한 뒤 면접은 대졸 그룹으로 한데 묶였다. 대학 때 전공공부를 게을리해서 그런지 아니면 군대에 오래 있어서 그랬던지 기술면접은 반도체 관련 질문에만 일부 대답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쉽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다음은 영어 면접. 기술면접 3인 1개 조가 그대로 들어갔다. 기술면접에서 다른 대졸 두 지원자보다 답변 수준이 처참했기에 영어면접에서 만회를 해야 했다. 영어 또는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하루 전 달달외운 몇 문장을 그래도 스무뜨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충 얼버 무릴 바에야 자신 있게 한국어로 대답하는 뻔뻔함을 보여버렸다. 당일 늦게까지 임원면접까지 했었던 것 같다. 임원면접은 6명 1개 조였는데 이대로 가다간 승산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서너 살 어린 대졸 친구들에게 밀리는 게 뻔했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승부를 걸어야 했다.


한 임원께서 자소서 내용을 보시고 특전사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 물으셨다. 순간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한 대답에 모든 걸 쏟아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전략적 선택'에 대한 핵심 내용만 던져 드렸다. 모 아니면 도였다. 끄덕끄덕 하시더니 이번에는 유럽배낭여행 이야기를 물으셨다. 요즘에야 유럽배낭여행이 흔하디 흔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자소서에 쓸만한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나는 농어촌학자금대출 VIP 아닌가. 연달아 질문이 서너 개 쏟아졌다. 주변 지원자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지만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마음속으로 ‘됐다. 이건 됐다.’고 느꼈다. 그리고 전역 바로 코 앞 3~4일 전 감격스러운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나름 큰기업 집단이고 신입사원이 많았던 터라 신입과정 합숙훈련을 1~2주 했었던 것 같다. 마지막날 오후에 사장님의 사령장 수여식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두어 시간 전쯤 급히 호출이 있었다. 내려가보니 공장장님이신 전무님께서 앉아 계셨다.

“H씨를 내가 면접 끝나고서 인사팀으로 데려갈라고 인사팀에 말해놨는데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는지 사령장에 기술직으로 발령을 냈더라고. 인사팀으로 바꿔도 문제없지?”

“넵! 문제없습니다. 뽑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팀으로 발령이 났고 전무후무하던 인사노무 경력이 시작되게 됐다.


몇 달이 지나 내가 왜 인사팀으로 발령 나게 됐는지를 지레짐작할 수 있는 기사 하나를 보게 됐다. D사 하청에서 비정규직노조 쟁위행위가 몇 해 전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입사하던 바로 직전 복수노조가 법적으로 허용됐다. 나는 특전사 출신. 바로 그거다. 혹시 모를 복수노조를 대비하여 나를 채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그 아무도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신 D사 관계자 분은 없었다.


#9-1.

입사 1년 만에 Kate님과 결혼도 했다. 장인어른께서 전역 후 큰기업에 입사 조건으로 Kate님과의 결혼을 승낙하셨었다. 이대로 쭈욱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다시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흥분이 며칠째 가라앉지 않았고 마침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그래,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마치 칼날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실은 바로 워킹홀리데이!라는 것 자체다.

평생 한 번밖에 없는 기회(사실 나이가 더 어렸다면 두 번이고 세 번도 기회는 있다. 용기가 없을 뿐). 나에게는 특히 한 번밖에 없을 수 밖이었고, 그 시일도 째깍째깍 줄어들고 있었다. D-3개월.

우선 비자를 받는 것이 급했다. 생일이 지나버리면 평생 워홀은 날아가버리는 것이라서. 돌이켜보면 회사를 좀 더 다니면서 퇴사를 했었어도 됐을 텐데 그때는 워홀에 홀려버린 상태라 퇴사부터 저지르고 봤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고맙게도 Kate님이 워홀이고 퇴사고 동의를 해주신 덕분이리라. 다시 한번 이 지면을 빌어 고맙습니다. 꾸뻑.(^^)(__)a


뉴질랜드로 결정하고 퇴사한 지 한 달여 만에 비자쿼터 안에 들어서 비자를 받았다. 만료 석 달을 남겨놓고서.

사실 전역할 때쯤 취업보다 전역하자마자 호주로 워홀을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Kate님께서 ‘그러면 헤어지는 거다'라고 해서 바로 접고 잊었기 때문에 D사에 운 좋게 입사하고, 다니면서 결혼도 했지만 2년 만에 다시 도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9-2.

퇴사하고 뉴질랜드로 가기 전까지 두 달 반이 남았었다. 그냥 시간아내월아 할 수 없어서 알바를 알아봤다. 정적인 건 질색이라 몸을 쓸 수 있는 동적인 걸 알아봤고 다행히 여기도 알고 봤더니 아주 큰기업 L사 계열사더라. 그런데 미쿡회사인 줄 알았던 C카C라가 L사 계열사인건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덕분에 지역연고와 전혀 상관없는 L야구팀을 1990년도부터 열렬히 응원해 왔는데 알바직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L사 계열사 소속이어서 그런지 L팀 야구티켓이 나왔다. 물론 그냥 뿌린 게 아니라 그룹웨어 인트라넷에 들어가서 신청했었는데 당첨이 된 것이다.


알바를 몸으로 뛰면서도 참 성실히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두어 달이 지나갈 무렵 팀장님이 따로 부르셨다.

“정규직 전환 자리가 생겨서 그러는데 우리 팀에서 H씨를 추천해 볼까 하는데 어떤가요?”

“아, 팀장님.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따로 개인적인 계획이 있어서 낼모레까지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었습니다.”


알바도 열심히 하면 위에서 챙겨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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