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 다운 길

Kia Ora, Aotearoa

82년생:엉뚱한 자서전

by 아이히어iHea


#10.

2013. 7. 13...... 일 인 것 같다.

원래 특정한 날짜 같은 거를 잘 기억하는데 벌써 12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그때는 SNS로 얼굴책을 주로 사용했어서 사이트에서 12년 전으로 돌려봐도 도착날은 아무런 글귀가 없네. 당연히 첫날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없어서 뭘 끄적거릴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뉴질랜드에서 딱 1년 빼기 2주 지냈고, 돌아오는 길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2주를 채워 1년을 꼬빡 채워 돌아왔다. 그래서 1년간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10. 에 전부 담아내기에는 스토리도 너무 많고, 공간도 너무 부족하기에 큼직큼직한 뼈대만 적으려고 한다. 대신 2014. 1. 1.부터 6. 30. 까지는 외교부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적은 글들이 몇 개 있어서 이 기간 동안의 읽을거리들은 따로 매거진 작품 《McLife in 뉴질랜드2013》으로 남겨두겠다.


뉴질랜드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워홀비자가 만 서른까지라 코리안 나이로 서른두 살에 갓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된 와이프와 단둘이 한국을 떴다. 주위에 결혼해서 왔다는 워홀러도 우리가 처음이라 하고, 결혼해도 올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부양가족이 없으면 된단다. 우리는 아직 신혼을 즐기자고 했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대만 친구:Hera는 아직 나이가 안 차서 뉴질랜드 워홀을 끝내고→ 영국 워홀→ 캐나다 워홀까지 다녀왔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쯤엔 서른네 살, 취업의 마지노선 나이일 거라 분명한 목표를 하나 세워두긴 했다. 돌아왔을 때 이력서에 어정쩡한 한 줄이 아니라 말끔한 한 줄을 적어 넣을 수 있어야만 한다.라고

뉴질랜드는 호주와 달리 워홀 쿼터가 있다. 한국인은 연간 1,200~1,300명 정도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그쯤 나이대 일 거라 한국 젊은 친구들의 성향을, 그리고 이미 다녀간 한국인들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나는 전혀 다른 플랜을 짜기로 했다.


‘한국인들이 없는, 한국인들이 가지 않는,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다녀오고 나서 돌이켜본 성과는 4분의 3 이상을 달성한 것 같기는 하다. 한국인들이 없는, 한국인들이 가지 않는,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것들을 해본 경험은 매거진 《McLife in 뉴질랜드2013》에 일부 수록돼 있다. 물론 해외통신원은 매주 글거리의 주제가 있어서 그에 맞추다 보니 전부를 싣진 못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10-1.

나는 ROTC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그래서 국내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에도 지부가 있어서 적절한 네트워크를 활용하기로 했다. 물론 하~안 참 높으신 선배님들 위주로 구성돼 있긴 했다. 간혹 젊은 선배님들도 계셨으나 나보다는 최소 5~6 기수가 높으셨다. 그래서 나 같은 최신(?) 기수 후배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이는 한참 취업전선에 뛰어들 나이에 해외취업이든 워홀이든 이민이든 외국에서의 도전 자체를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현실인 것 같다.


2013년 추석연휴였다. 한 선배님께서 댁으로 초대를 해주셨다. 한국의 추석날짜가 뉴질랜드에서는 당연히 아무 날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이 그리울 거라 그러셨던 모양이다. 여기서 선배님으로부터 아주 뒤통수를 망치로 한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명언(?)을 듣게 됐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살아오면서 내게 가장 충격을 안겨준 말씀 TOP1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봐 H후배. 네가 여기 뉴질랜드까지 오게 된 가장 큰 결정적 이유는 네가 잘 나서가 절대 아니다. 바로 네 와이프가 허락해 준 덕분이다. 그러니까 와이프한테 잘해라!"

지금까지 《나 다운 길》의 에피소드들은 사실 내가 스스로 결정해 왔던 것들이기 때문에 헤쳐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의 이어질 에피소드들은 와이프님이 내 결정(물론 나 혼자만의 결정은 아님)을 믿고 적극 지지해 준 덕분에 헤쳐 나오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원래 석 달 어학연수였는데 두 달째 첫 일자리를 잡은데도 알고 보니 CEO가 ROTC선배님 이셨고, 남섬 블레넘에 홀로 내려가서 잡은 숙소의 사장님 장인어른이 S대 선배님이셔서 초대를 받아 뉴질랜드 전복 버터구이도 먹어봤고, 와이프는 북섬에서 바리스타를 했는데 카페 일자리를 잡도록 도와주신 분도 선배님, 와이프가 남섬으로 내려와 같이 여행하던 와중에 퀸스타운에서 2~3일 한국식 집밥을 먹으며 내 집같이 편안히 지내게 해 주셨던 사장님도 선배님...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참 많은 선배님들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더랬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0-2.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일자리를 찾을 때였다. 마케팅 회사였는데 일자리 공고가 나서 지원을 했다. 나는 전자공학과며, 장교며, 특전사며, 일본계 회사 인사팀이며, 워킹홀리데이를 온 현재까지 이력을 적어냈더니 며칠 뒤 회신 메일이 왔다.

'H라는 당신 자체가 궁금해서 그러니 인터뷰를 보러 와줄래요?'

머지? 이 사람들.

회사는 정규직을 채용하려던 거였는데 워홀비자인 내가 지원해서 애초에 자격이 안 됐지만 이력들이 너무 신기해서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서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한 거였단다. 중국인 워크 비자인 친구와 워홀 비자인 나 사이에 결국엔 중국인 친구가 채용됐지만 내게는 아주 특별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였다.


#10-3.

나는 기회가 온다면 이민도 고려했었지만 와이프는 절대 안 된다 해서 컴백하기로 결심한 뒤로부터는 혼자 남섬에서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닐 때도 수개월 앞으로 다가온 서른네 살의 재취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국내 취업시장 상황과 외국에 길게 머물러보면서 느낀 소감 등을 두루 고려해 봤을 때 해답은 '해외취업'이었다. 그래서 와이프를 다시 만나기 전에 어느 정도 취업루트를 뚫어놓고자 해서 몇 군데 알아보고 있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월드잡'이라는 사이트가 해외취업으로서는 정보나 지원이 많았던 것 같고, 한편, 2014년 당시 한화그룹에서 이라크에 6조 원가량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있었고 이라크가 아무래도 중동국가다 보니 위험지역이라 3 지대 개념의 경호. 방호 인력도 동시에 채용하고 있었다. 나는 특전사 중대장 출신이니 3 지대 개념 중에서도 가장 안쪽의 시설에서 외곽 경호. 방호 인력들을 지휘통제하는 업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직무에 지원을 했었고 뉴질랜드에 있으면서 온라인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까지 했었다. 다만, 출국은 한국에 돌아간 뒤 9월 경이라고 했다. 이 사실을 깜짝 서프라이즈를 하려고 아무 말 안 하고 귀국까지 했었고, 처갓집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오픈했다가 와이프로부터 한 소리 먹었다.

"그런 위험한 지역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갈 거면 이혼하고 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자마자 한동안 머뭇머뭇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이라크는 접었다. 마침 원래 출국이었다면 9월이었을 무렵 뉴스 속보로 이라크 지역에 테러 등 위험이 있어 외교부에서 전면적으로 이라크 출국에 대한 경보를 내리면서 비자를 무기한 연기했더랬다. 어차피 간다고 했어도 갈 수 없었을 운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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