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엉뚱한 자서전
#11.
뉴질랜드로 떠난 지 딱 1년 만인 2014. 7. 12. 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33살.
당장 재취업이 급선무였고 뉴질랜드에서 컴백하며 찾은 '답' 중의 하나는 바로 '해외취업'이었다. 나이는 아직 재도전하기에 충분했고, 1년 바깥 물을 먹었더니 국내를 포함해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에는 1,000% 공감되었다. 어차피 국내는 취업시장 자체가 너무 경쟁 위주여서 오히려 너무 멀지만 않고 Kate님이 승낙만 해준다면 도전 자체는 긍정적이었다. 이라크만 빼고.
하루가 멀게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월드잡 등 여러 해외취업 사이트를 두리번거렸다. 장교생활로 터득한 관리 경력과 뉴질랜드 워홀 전 다녔던 D사 인사팀 경력을 장점삼아 두 군데나 합격을 했다.
먼저 아프리카 곳곳에 지사를 둔 가발회사였다. 합격한 곳은 세네갈이었던 것 같은데 가나,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등 근무지 순환도 가능하다고 했다. 뭐 어차피 해외취업을 목표로 정한 이상 아프리카여도 치안 정도만 괜찮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현실적인 Kate님은 극구 반대했다. 가족까지 동반 지원해 준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두 번째는 이곳에서 찾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 L그룹 L케미칼 말레이시아법인(L케미칼타이탄)에서 현지 채용 인턴으로 5명을 선발하는 모집공고에서 우여곡절 끝에 합격했다. 두 곳을 저울질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비행기로 훠얼씬 가까운 말레이시아를 최종 선택하기로 했다. 대신 L케미칼타이탄은 현지 인턴 석 달 근무 후 평가, 그리고 정규직 전환 조건이었고, 가족은 같이 갈 수 없었다.
7월 중순에 컴백하고서 10월 초에 말레이시아로 출국, 그리고 2015년 1월 초 귀국 일정이었으니 석 달도 채 안돼 다시 도전자가 되었다. 일단 Kate님과는 석 달 뒤 말레이시아로 데려간다는 계획으로 설득하고 독수공방을 시켜 미안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이때 대한항공을 처음 타봤던 것 같다. 인턴 다섯 명 중에서는 내가 제일 형이었고, 케미칼이라 그런지 나머지 넷은 전부 화공과였던 것 같고 나만 전자공학이었다. 남자 셋 여자 둘.
L케미칼타이탄에는 L사가 인수합병을 했다 보니 법인 대표를 포함해 L사 한국본사에서 파견 와 있는 직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현지 채용 조건이다 보니 임금은 현지 대졸에서 +α 수준이었고 다섯 명이서 같이 지낼 수 있는 아파트 숙소(남자 셋, 여자 둘 각각 세대 분리) 및 출퇴근 차량 1대 지원이어서 혼자 온 경우라면 충분히 지낼만했지만 만약 내가 Kate님을 데려온다고 가정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반대로 본사 파견 직원 같은 경우에는 국내 정규 임금에 + 파견비용 + 가족동반 + 아파트, 차량 지원까지 역시 대기업이구나!& 이 조건이면 말레이시아에서 중산층 이상으로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녀들도 근처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부러워할 것도 없이 석 달 동안 열심히 배우고 업무에 충실한 한편 말레이시아에서의 석 달을 즐겨야 했다.
말레이시아도 오른쪽 운전이라 뉴질랜드에서 운전해 본 게 있어서 출퇴근차량은 주로 큰 형인 내가 전담했다. 그래서 퇴근 후나 주말 등 휴일에 주변 나들이도 심심찮게 다니곤 했다. L케미칼타이탄이 서말레이시아 남쪽 조호바루에 있어서 차를 타고 중부 말라카에도 가보고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도 가봤다. 현지 동료도 사귄(그 사귄 말고) 덕분에 그 친구 친구결혼식에도 가보고 그 친구 언니집에도 가보고 세계테마기행을 톡톡히 해봤다.
뉴질랜드에서 짧았지만 같이 일했던 나름 친했던 말레이시아 여사친 둘이 가까운 싱가포르에서 일한다길래 싱가포르에도 버스 타고 넘어가서 만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가 아닌 데서 외국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는 경험은 꽤 흥미로웠다.
크리스마스 휴일 때는 남 2+여 1+현지 여동료 1 이렇게 넷이서 서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도 놀러 가기도 했다. 남동생 하나가 여동생 하나를 관심 있어해서 썸을 위한 작업이었지만 결국 잘 안 됐다.
인턴 종료 및 평가가 다가올 때쯤엔 영어로 pt를 해야 하는 압박감도 꽤 있었다. 나는 졸업하고 전공에 손 뗀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때라 떨어지면 어쩌나 조바심도 일부 있었지만 반대로 정규직전환이 된다 하더라도 이 급여로 Kate님까지 데려와서 얼마나 다닐 수 있을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석 달 전 올 때는 웬만해선 다섯 명 전부 전환시켜 준다고 철통같이 믿었었는데 부족한 게 조금 있었던 모양인지 나 포함 두 명이 탈락됐다. 동생하나는 한국에 부양하는 조부모님 때문에, 나는 Kate님 때문에 탈락을 자기합리화했다. 아마도 합격했어도 얼마못가 컴백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합격한 셋 동생들도 1년도 채 안돼 국내 동종회사들로 이직했다고들 하더라.
그렇게 말레이시아에서의 해외취업 도전기도 슬슬 마무리되어 가면서 2014년이 지고 2015년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