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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Oct 06. 2015

당신이 있어 서울은 따뜻하네요




당신이 있어 서울은 따뜻하네요
(급체의 추억)



살면서 제대로 식겁한 경험을 꼽으라면 어김없이 그때가 떠오른다. 혼자 서울에 시험을 보러 왔다가 급체했던 적이 있다. 대학교 입학시험이었는데 다행히 시험 때까지는 멀쩡하다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심각한 상태가 됐다. 지하철을 내려서 계단을 기다시피 올라왔다. 걸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역 천장은 제멋대로 빙빙거렸다. 서울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과연 죽지 않고 내 고향 부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비장한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를 악 물고 옮겼다. 멀리 신문을 파는 가판이 보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죄송하지만 근처에 약국이 없나요?” 잘 모른다는 싸늘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무작정 역 밖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하늘이 통째로 돌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 비틀비틀 걸었는데 그때 멀리 작은 슈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숲 속을 2박3일 헤매다가 인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한, 딱 그런 기분이었다. 슈퍼에 들어가 아저씨에게 말했다. “까스명수 한 병만 주세요...”  


주인아저씨는 까스명수를 내밀면서 말씀하셨다. “학생, 안색이 엄청 안 좋은데 이걸로 되겠어? 괜찮아요?” 나는 전혀 안 괜찮으며, 그렇지만 일단 이 까스명수를 마셔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근처에 약국이 없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 근처에는 걸어서 갈 만한 약국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약국 말고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좀 데려가주면 좋은데 가게를 비울 수도 없고...” 아저씨는 이런저런 궁리를 짜내느라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때마침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달 아저씨를 보고는 반색이 돼서 외쳤다. “어, 마침 오네! 이 학생이 배가 많이 아픈가 봐. 우리 오토바이로 병원이나 약국에 좀 태워다 줘야겠는데?” 느닷없는 요구였지만 배달 아저씨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토바이를 타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서울에 처음 온 날, 태어나 오토바이를 처음 타고서 시내 한복판을 질주하다니! 아픈 와중에도 그 상황이 흥미로운 나머지 ‘나 출세했네’ 하고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던 것이다. 


길거리에서 늘상 봐 왔던 조그맣고 빨간 배달 오토바이는 제법 승차감이 좋았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귓전을 스쳤다. 병원에 가면 좋은데 더 가까운 곳에 약국이 있으니 거기로 가겠다는 말 같았다. 감색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의 등짝은 듬직하고 따뜻해서 서울에 혼자 있는 그 순간이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불현 듯 서울사람 조심하라던 부산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돌아가자마자 그런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한 친구들을 아주 그냥 따끔하게 혼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8차선 도로를 달렸다. 


아저씨는 인사동의 한 약국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셨다. 그러더니 빨리 들어가서 약을 사 먹으라며, 급체한 데는 약 하나만 먹어도 금방 내려갈 거라고 용기(?)를 주시고는 사라졌다. 아저씨 말이 맞았다. 약 하나 먹었을 뿐인데 지옥이 천국으로 금세 바뀌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평생 남을 후회가 밀려왔다. 그 슈퍼 이름을 알아뒀어야 했다! 서울에 처음 온데다가 배가 아파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슈퍼 이름은커녕 내가 어느 지하철역에서 내렸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지막에 갔던 약국 이전의 장소들은 꿈결처럼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그 곳은 어디였을까? 그 슈퍼는 지금도 있을까? 내가 아저씨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찾아가서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만 전하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따뜻했던 말 한마디를 꼽으라면, 가장 인간적이었던 말 한마디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슈퍼 아저씨가 내게 건넸던 한 마디를 꼽고 싶다. 


“학생, 괜찮아?” 


어딘가에서 여전히 따뜻한 말들을 하며 살고 계실 아저씨에게 이 공간을 빌려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눈곱만큼 적은 확률이라도 아저씨가 이 책을 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믿으면서 말이다. 


“아저씨!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산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촌 아가씨가 낯선 서울 땅 한복판에서, 여기서 이렇게 죽는가보다 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아저씨가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지금 제가 10년째 살고 있는 이 서울은 그때 아저씨의 손을 잡은 이후로 10년 내내 쭉 따뜻하답니다. 저도 아저씨처럼 살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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