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
“론도 a단조. 이 곡을 치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햇빛이 나건, 비가 오건, 기분이 좋건, 울적하건 매일 그날의 얘기를 들려줘요. 또 그게 다 인생이라고 말해요. 모차르트의 비밀이죠. 나직하지만 체념이 절대 아니에요. 가만히 봐봐 깊이 보고 사랑해봐, 그러잖아요.”
- JTBC드라마 <밀회> 16회, 선재(유아인 분)의 대사
“모차르트에게 행복한 생애를 주었더라면 아마 멘델스존과 비슷해졌을 것이다.”
어느 비평가의 명언이다.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모차르트에 비해, 멘델스존은 연주회의 성공으로 물질적 풍요와 명성을 누렸고 더불어 좋은 벗들과의 교우 등 화사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결혼행진곡만 들어봐도 경쾌하고 구김살 없는 멘델스존의 생애가 느껴진다. 모차르트 역시 멘델스존처럼 경쾌하고 밝은 곡을 많이 썼지만 어떤 곡들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을 준다. 특히 모차르트의 론도 K.511을 듣고 있으면 눈물을 머금은 채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이 떠오른다. 이것이 아마 모차르트가 자신의 운명을 향해 지었던 표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차르트는 비극적 운명에 맞서 싸우기보다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몇몇 곡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예술가에게 비극은 절대 불행이 아니다. 모차르트란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무늬. 사랑과 이별, 눈물과 웃음, 기쁨과 고통.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 음표가 되어 그의 오선지에 박혔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삶과 모차르트 음악은 마치 반으로 접힌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만약 신이 모차르트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그의 운명에서 비극을 공제해줬다면 우리 영혼을 치유해주는 위대한 음악을 우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류적 불행이 아닌가.
비극으로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그린 예술가가 어디 모차르트뿐이던가. 베토벤이 청력을 잃지 않았다면, 고흐와 뭉크가 정신 질환을 앓지 않았다면 그들의 작품은 우리의 영혼을 흔들 만큼 힘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적 경험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이다.”
모차르트와 같은 예술가를 보면 ‘아모르파티 amor fati’란 말이 떠오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는 이 말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운명관이다. 니체는 운명이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지만 운명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필연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의 운명을 어쩔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 본래의 창조성도 발휘된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수많은 명곡들을 만들어 낸 모차르트의 창조의 원천은 ‘아모르파티’였을 것이다.
음악가의 음악, 미술가의 미술이 그것을 창조한 자의 인생을 담아낸 결과물이듯, 말이란 것도 말하는 자의 인생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예술처럼 아름다운 말은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결과물이다. 말은 머리와 입술로부터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말은 그 사람의 영혼에서 창조되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비극마저 끌어안는 영혼에서 데칼코마니처럼 아름다운 말이 접혀 나온다고. 누군가의 말이 나의 영혼을 흔들 때, 그 말은 평범한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른 루트로 내게 온단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성을 거쳐 인식되는 언어가 아니라 마치 음악처럼 직관되는 언어처럼 느껴진다. 이런 언어의 주인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남김없이 사랑할 것만 같다. 불안과 공포, 가난과 외로움까지도.
누군가 내게 글 쓰는 일이 왜 좋은지 묻는다면, 글을 쓴다는 것의 가장 좋은 점 하나를 말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간결하게 이리 답할 것이다. “아모르파티!” 글쓰기는 내가 내 운명을 더욱 사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나의 삶에 주어지는 모든 비극과 희극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 의무감에 감사한다. 글은 내 인생의 모든 경험과 나의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글을 쓰려면 나는 내 운명 구석구석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모르파티를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들어야만 하는 이 의무감이 좋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내 운명 속에 든 비극을 더욱 뜨겁게 끌어안아야만 한다.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외로움이 기회처럼 느껴지고, 가난이 재산처럼 느껴지며, 슬픔이 행운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줄 때에도 그 상처가 언젠가 내 글의 가장 아름다운 문양이 될 것임을 믿기에 그 사람을 이제 그만 미워하기로 한다. 이런 자발적 ‘어쩔 수 없음’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말을 한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있는 그대로, 아모르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