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2. peace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도 비난을 하고, 말을 많이 해도 비난을 하며, 조금만 말해도 비난을 한다.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 <법구경> 中
#3. 변명의 구차함
: + chapter2. peace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남에게 설명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 자신감이 없거나 착한 아이 콤플렉스일 가능성도 크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8년 전쯤 여의도 공원에서 한낮에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했을 때의 에피소드다. 그때 우리에겐 케이크와 초가 있었지만 불을 붙이다가 성냥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불을 켤 수 없게 됐다. 우리는 누구든 지나가는 남자에게 라이터를 빌려보자 했다. 그런데 한낮의 여의도 공원은 매우 인적이 드물었고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만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주머니, 실례지만 혹시 라이터... 없으시죠?" 아주머니는 없다고 대답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서려다가 나는 괜히 궁금해하지도 않는 아주머니에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하하... 라이터는... 음... 제 친구 생일인데 케이크 생일 초에 불을 붙이려고요. 하하..."
원래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더 엉뚱해지곤 했다. 친구들과 나는 아주머니가 지나가고 나서 한참을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너는 그걸 뭘 그렇게 설명하느냐." 이것이 웃음 포인트였다. 낙엽만 떨어져도 데굴거리며 웃던 그 시절 우리는, 아주머니를 향한 나의 구차한 설명에 모두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 이제는 추억이 된 그때의 에피소드는 결국 나의 내면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라이터를 빌리면 아주머니에게 혹시 흡연자로 오해받는 건 아닐까 그게 두려웠던 거다. 아직도 내게는 모두에게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은 바보 같은 욕심이 남아있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무언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게 '변명'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변명'이란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하는 것을 일컫는 단어다.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사과와 더불어서 왜 그런 잘못을 하게 됐는지 이유를 덧붙이는 건 필요한 일이다. 다만 사과 뒤에 붙는 이유가 지나치게 구체적이거나 지나치게 길어지면 모양 빠지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부연설명은 원래의 담백한 사전적 의미로써의 '변명'을 넘어서, 우리가 흔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구차한 뉘앙스의 '변명'이 되기 십상이다. 변명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억울함의 호소이거나, 내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사실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는 부정이다. 둘 다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다.
변명을 길게 하는 사람 치고 품위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감히 주제넘게 누군가의 인품을 마음속으로 가늠해볼 때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사과하느냐를 살핀다.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되, 변명이 길어진다면 그 사람은 어쩐지 인격적으로 못 미더운 느낌이 들곤 했다. 자신을 지나치게 변호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철저히 방어한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타인이 무언가 잘못했을 때 더욱 엄격하게 공격할 것 같다. 나 역시도 변명이란 걸 하며 사는 보통의 존재이지만 변명을 꼭 해야 할 때는 절대 길어지지 않도록, 이것 하나만큼은 유념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그만하자. 구차하다. 계속하면 없어 보인다.'
다시 첫 번째 '라이터 에피소드'로 돌아가서! 잘못에 대한 변명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에도 간결하게 말하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일이다. 부탁을 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빚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때 자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된다. 부탁을 하는 을이 부탁의 말을 너무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게 되면 자신이 을이란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서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셈이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인품을 가진 갑이라면 을이 저자세로 나올 때 우월감보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을 역시 스스로의 당당함을 손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명이나 구차한 말을 하는 기저에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받고 싶지 않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비난받기 마련이라는 <법구경>의 구절을 기억하는 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되겠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누군가로부터 욕 듣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변명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당당함은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한 느낌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