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2. peace
#5. 거절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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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의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어떤 질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리포터의 질문에 톰 크루즈는 진중하고 밝은 미소로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게요’라고 말했다. 리포터 역시 아무렇지 않게 오케이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때 내가 느낀 건 문화차이였을까? '아... 모든 질문에 다 대답을 할 필요는 없는 거구나' 조금 웃기긴 하지만 내게는 꽤 진지한 깨달음이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예의 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이라고 다 좋은 질문은 아니기에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대답을 하고 나서 스스로 상처받을 질문이라면, 대답을 하고 나서 괜한 오해를 사거나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질문이라면 아예 대답을 안 하는 편이 현명하겠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호회에는 가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싱어송 라이터가 한 분 있다. 사람들은 이 연사님만 보면 노래를 해 달라고 하는데 노래를 요청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노래실력을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실제로 꼭 듣고 싶다고 간곡히 청하는 예의파가 있는가 하면, 다짜고짜 ‘OO 씨, 나와서 노래 한 곡 해줘요’하는 명령파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이런 막무가내 식으로 요구하는 나이 지긋한 연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기타도 있겠다 노래 한 곡을 불러보라고 재차 요구했다. 어르신의 부탁이라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연사님은 ‘제가 지금은 준비가 안 돼서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진정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였다. 심지어 ‘지금 이런 자리에서 노래 하나 못하면 큰 무대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나무라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마음속으로 그 연사님이 절대 노래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결국 연사님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다음에 꼭 불러드리겠단 정중한 말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을 피하는 일과 거절을 하는 일은 미안한 일이 아니라 정당한 일이다. 다만 너무 직접적이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베베 꼬아서 대답하면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으므로 지혜를 필요로 한다.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를 보호하는 거절의 지혜는 바로 '위트'를 더하는 것이다.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의사 전달이야 확실히 되겠지만 부탁을 한 상대를 무안하게 할 수도 있다. 기분 좋은 위트를 섞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의 바르게 전달해야 한다.
가끔 통기타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부르는 남성연사님이 있다. 어느 날은 여성 연사님이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아, 다음에 꼭 불러드릴게요!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 요청하니까 떨려서 오늘은 안 되겠는걸요!'하고 거절했다. 있는 그대로 '악보를 안 가지고 와서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그는 상대방의 미모를 칭찬하며 위트 있게 대응함으로써 상대가 섭섭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 연사님을 보며 거절이 때로는 전화위복처럼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거절이란 꼭 피하고 싶은 곤란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 수도 있고 관계를 더욱 진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위트라는 지혜를 가미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