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2. peace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이고, 몸을 망치는 도끼이다."
- <명심보감> 中
#7. 말을 삼키다
: + chapter2. peace
누군가 그랬다. 열 가지 좋은 습관을 갖는 것보다, 자신을 괴롭히는 한 가지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말도 그렇다. 열 마디의 좋은 말을 하는 것보다, 한 마디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말하기다. 마늘, 양파, 고기, 버섯, 두부 등등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잔뜩 넣어서 일품 요리를 만들어봤자 마지막에 잿가루를 뿌린다면 그 요리는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제대로 말을 하는 사람은 좋은 말을 많이 하려고 욕심내기 보다는 재뿌리는 한 마디를 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는 삼사일언(三思一言)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공자는 구사일언(九思一言)하라고 <논어>에서 이르고 있다. 아홉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는 건, 해서 안 될 말은 철저히 하지 말란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하지 않아야 할 말이 섞여 나오게 돼 있다. 그러니 우리는 구사일언하여, 하고 싶지만 해선 안 될 말을 꿀꺽 삼키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연습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말 삼키기도 노력하면 할수록 더 잘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호회에 25살 먹은 청년 한 명이 있다. 생각도 바르고 예의 있는 모습이 보기 좋은 친구다. 어느 날은 각자의 고민을 말하면 그것에 대해 다른 연사들이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다른 연사에게 자신이 조언을 해줄 차례가 오면 번번이 패스했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닌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성의 없는 태도일까 의아했다. 그런데 청년은 매번 패스하는 건 아니었고 자신이 겪었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이 나오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고 청년에게 다가간 나는 발언권을 여러 번 포기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청년은 답하길,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넘겨짚어서 ‘이래라, 저래라’ 조언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의 신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은 타인이 자신에게 고민 상담을 해오면 괜히 으쓱해져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데 청년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자신의 혀를 자제시켰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청년의 구사일언 습관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청년은 고등학교 시절에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미대 진학을 준비하는 것에 반대했고 공부에만 집중하길 바랐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미술학원에 다니며 꿈을 향해 정진했다. 자연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어느 날 밤늦게 미술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더니 야자를 마치고 귀가한 청년의 동생이 아버지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현관에 들어서는 청년을 힐끔 보더니 동생을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너는 니 형처럼 저렇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거라.” 그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간 청년은 칼 하나가 가슴 정중앙에 ‘쿡’하고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을 줄 알았건만 가슴에 꽂힌 칼이 아직도 빠지지 않는단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를 볼 때면 가슴 가운데가 쓰리다고 청년은 고백했다. 그때 일로 청년은 스스로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로 남을 수 있는 말이라면 절대로 내뱉지 않겠다고. 아버지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칼을 꽂는 일은 살면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이것이 그 청년이 가진 신중함의 배경이었다.
청년의 말을 듣고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쪽에선 '형처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는 말이 7년이 지나도 아플 만큼 그렇게 심한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문을 갖는 순간 스스로의 경솔함이 따갑도록 실감되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청년의 아버지도 나처럼 '이게 그렇게 심한 말은 아닐 거야'란 생각으로 그 말을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듣는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자신이 의도한 바가 듣는 이에게도 딱 그만큼의 중량감으로 전해질 것이란 착각. 이것은 아주 무서운 착각이다. 자신은 시속 20km로 칼을 던졌어도, 그걸 맞는 사람에게는 시속 200km로 꽂힐 수 있단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때 청년의 아버지가 만약 드시던 밥과 함께 그 말씀을 삼켰더라면 지금 아들과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분명 달라졌을 거라 아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밥을 삼키는 것처럼 말을 삼키는 것도 쉬운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숨 짓는 대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연습해볼 수도 있겠다.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 받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실례가 되겠다 싶으면 비록 그 말이 뱉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도 꾹 삼켜보는 거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밥을 먹고 몇 시간이 지나면 배가 꺼지듯,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고통 또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말을 삼키는 것은 성숙한 인격의 일이다. '삼킨다'는 말은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두려움을 삼키다'는 말에는, 그 사람이 두려움을 먹어 해치울 수 있는 배짱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것 역시 삼킨 말을 내 안에서 삭혀서 없애버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넉넉한 인격의 소유자란 걸 증명하는 일이다. "무엇이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고 이룰 수 있다." 누군가가 남긴 이 강렬한 명언처럼 우리가 훈련을 통해 어떤 말이든 참아낼 수 있다면 무엇이고 이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