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1. soul
#12. 해석과 표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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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간절한 일이기도 할 때, 반드시 도와주는 힘이 작용한다. '말'이라는 주제로 한 권의 글을 만들어보자 마음 먹었을 때 생각지 않게도 음악이 나를 도왔다. 조예도 없거니와 열렬하지도 않았던 클래식이 느닷없이 내게 찾아온 건 필연처럼 느껴졌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나는 음악에 기대어 말을 생각하게 됐고 그러자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과 음악은 닮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는 사람'과 '악기 연주자'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나는 내내 피아니스트의 연주 영상과 인터뷰를 보면서 스피치에 대한 글을 써 나갈 수 있었다.
클래식이 지닌 무한한 재미는 '해석'에 있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클래식이란 건 옛날에 살았던 작곡가들이 남겨 놓은 음악을 현재에 살아있는 연주자가 자신만의 개성으로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이다. 똑같은 곡을 반복해서 들어도 지겹지 않은 이유는 연주자마다 각자의 해석으로 조금씩 다른 곡을 내놓기 때문이다. 같은 곡일지라도 연주자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다른 경우도 많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을 A, B 두 피아니스트가 연주했을 때 A의 차이콥스키는 슬프고 숙명적이었지만, B의 차이콥스키는 웅장하고 도전적이었다. 너무 다른 해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석에 정답은 없겠지만 어떤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잘 한다고 할 때 단지 실수를 한 번도 하지 않거나 테크닉이 좋단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곡의 해석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개성 있으며 수준 높았는가 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란, 곡 해석을 잘 하는 피아니스트 같은 사람이다. 테크닉적으로 달변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대한 해석이 듣는 이의 영혼을 움직일 만큼 특별하다면 훌륭한 스피커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말을 한다는 건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연구하여 연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자신의 영혼의 깊이만큼 말하고 연주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은 마치 클래식 악보처럼 유일한 것,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이지만 화자가 어떤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해석된다. 그 해석이 바로 그 사람의 개성이고 영혼의 모습이다. 피아니스트는 자신만의 곡 해석과 그것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을 인터뷰를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늘 영감을 구하고 지적인 소양을 쌓고, 작곡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도 한다. 말을 하는 것도 피아니스트의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좋은 글도 마찬가지다. 세상이란 악보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내는 글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금 자신의 피아노 앞에 앉아 삶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책을 읽기 전보다 더 깊고 겸허하고 울림 있는 해석을 통과한 연주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좋은 책을 읽은 것이다.
해석이 중요하듯 표현도 중요하다. 피아니스트가 악보를 들여다보며 오래도록 연구하는 건 해석의 일이지만, 실제로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을 연주하는 건 표현의 일이다.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해석을 마치면 그다음은 해석한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야 한다. 표현은 해석한 바를 타인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테크닉이란 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테크닉만 있는 피아니스트도, 테크닉만 없는 피아니스트도 좋은 피아니스트는 아니다. 좋은 스피커 또한 좋은 해석에서 나온 좋은 생각을 탁월한 표현으로 임팩트 있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 말을 잘 하기 위해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석과 표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