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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Oct 30. 2015

소통을 허락하는 권위




소통을 허락하는 권위



회사란 곳을 다니면서 내가 얻은 근로소득이 있다면 내가 회사 생활과 안 어울리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게 유의미한 소득이었다. 어쩌면 나는 돈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회사에 다닌 것도 같다. 회사란 울타리 바깥을 꿈꾸는 첫째 이유는, 나는 주어진 일보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야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얼 만들고 싶은지 비로소 찾기도 했고. 둘째 이유는, 조용한 겉모습과 달리 나는 틀을 갑갑해하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란 거다. 회사의 관습들이 참을 수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특히 ‘권위’에 대해 그렇다. 회사는 권위의 힘으로 돌아가는 작은 세계다. 그리고 내겐 권위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재채기가 나왔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오늘부터 회사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밥벌이는 지겹고도 숭고한 일이니까. 다만 내가 거쳐 온 여러 회사들과 대학시절에 경험한 십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돌이켜보며, 대한민국의 회사라는 조직이 갖는 권위와 그 경직성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쓰려는 것뿐이다.


많은 회사들이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들어가면 창의적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당신들의 천국이다. 권위의 틀에 갇힌 회사에서는 새로운 생각을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은 상사의 권위를 위협하는 행동이다. 뭐, 어차피 말할 창구도 없지만서도. 이런 회사에서는 상사가 잘못된 것을 시키더라도 군말 없이 따르는 부하직원이 제일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우리가 그 인간성을 동경해마지 않았던 수많은 세계명작 속 주인공들처럼 굴었다가는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권위에 대한 나의 알레르기 반응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가도 싶다. 나의 마음은 소설에서 본 이상적인 인간군상을 추구하지만, 갑옷처럼 차갑고 단단한 현실의 권위 앞에 설 때면 매번 풀이 죽는다. 존경할 점 없는 허울뿐인 권위. 그것을 따르고자 하니 어딘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진실한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 같은, 세계명작 속 정의로운 주인공과 너무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권위적 분위기로 가득한 집단에는 소통이 없다.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수평적 관계가 성립돼야 하는데, 권위의 세계는 워낙 수직적인 곳이라 상명하복만 있을 뿐이다. 소통이 없는 회사는 직원들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도구는 원래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니까. 주인이 사용하는 도구는 온전히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하며 자신의 언어와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도구는 주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가져다준다 해도 그 전에 주인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버려질 위험에 처하고 만다.


나는 회의시간과 점심시간의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에 종종 소름이 돋곤 했다. 더 나은 성과를 얻고자 매일 아침 회의를 하지만 그건 회의라기 보단 일방적인 업무지시에 가까웠다. 그러다 몇 시간 후 점심시간이 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회사 밖에서 진짜 회의가 열린다. 젊은 말단 직원들끼리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으면 회사의 근본적인 문제점부터 이상적인 경영 방안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건설적이고 예리한 분석들이 쏟아진다. 그렇다. 이것을 우리는 뒷담화라 부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는 완벽할 수 없는 회의인 것이다. ‘아, 이런 이야기를 윗사람들이 듣는다면 회사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이런 생각이 잠깐 스치긴 하지만 굳이 붙잡진 않는다. 어차피 부질없으니까. 들으려 하는 사람이 있어야 말하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회사가 원하는 회의는 이미 아침에 끝났다.


물론 내가 경험한 회사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었고, 대한민국의 모든 회사가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권위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도 있다고 들었다. 김 대리님, 오 차장님이라 부르는 대신에 서로의 영어 이름을 부르는 회사가 있다나? 심지어 대표에게도 말이다. 한술 더 떠서 그 대표란 자는 부하 직원에게 먼저 질문이란 걸 한단다. 회사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 직원은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동료들끼리 나눈 뒷담화를 공식화하여 대표에게 일대일로 들려주는 것이다. 회의보다 차라리 이런 대화가 대표에겐 더 유익한 일 아니겠는가? 분명 이러한 ‘듣기 작업’은 대표 스스로가 권위를 내려놓고서 한 일이겠지만, 오히려 진정한 권위를 그에게 부여할 것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런 회사는 섬나라에나 있을 법하다.


워낙 부정적으로 많이 쓰여 그렇지 ‘권위’란 단어가 태생이 부정적이진 않다. 사전은 권위에 대해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긍정적 의미의 진정한 권위와 억압적인 권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소통 의지’에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언가 말을 ‘하게’ 한다면 진정한 권위이고, 무언가 말을 ‘참게’ 한다면 억압적인 권위이다. 박완서의 소설 <엄마의 말뚝>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권위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참게 하는 어떤 힘이 아닐까?”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돌보는 ‘나’가 의사들을 지켜보며 하는 생각이다.


의사든, 판사든, 교수든, 정치가든, 사장이든, 아니면 한 가정의 가장이든. 권위를 가진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한번쯤 이런 질문을 해봐도 괜찮겠다. 나의 권위는 소통을 허락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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