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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11. 2015

시그니쳐(signature) 화법

당신의 단어는 무엇입니까




#2. 시그니쳐(signature) 화법
: 당신의 단어는 무엇입니까



영화기자로 일할 때였다. 102번째 작품 <화장>을 들고 돌아온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했다. 직업의 특성 덕에 많은 배우와 감독을 인터뷰했지만 그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고작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왜 어떤 이의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어떤 이의 말은 그렇지 않은 걸까.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내 머릿속 한쪽 구석에서는 엉뚱하게도 이런 연구가 계속됐다. 어쨌든 봄이 막 시작되던 4월의 오후,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기억에 남는 3분의 1에 속하는 것이었다.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걸 묻는다. 나만 아는 작은 사치다. "평생 영화를 하셨잖아요. 영화하기 참 잘했단 생각을 하신 적 많으세요?" 임권택 감독이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요." 어떠한 부연 설명도 따라 붙지 않은 간명한 대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임 감독은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좋아하는'이란 말을 반복했다. 102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는 이전의 질문에도 그는 너무 짧은 대답으로 나를 당황케 했다. "영화를 좋아해서죠."


그날 인터뷰를 하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나는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며칠 후, 임 감독의 인터뷰를 글로 재구성하던 중 불쑥 답이 나타났다. 왜 어떤 이의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무는 힘을 갖는지, 그 연구에 대한 답 말이다. 그런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단어'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임 감독이 '좋아하는'이란 말을 반복한  것처럼, 어떤 인터뷰이들은 마치 서명을 하듯 자신도 모르게 특정 단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하는 단어가 곧 그 사람의 철학이다.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치가 특정 단어로써 드러나는데, 1시간이라는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열 번은 반복된다. '자기만의 단어'를 가진 사람과의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그들이 삶의 철학을 분명히 지니고 있고, 그 철학이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꼭 거창한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예를 들면 배우 김고은은 '즐긴다'란 말을 반복했고 박보검은 '감사'란 단어를, 김규리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런 대화는 나로 하여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지', '내 상 감사하고 사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 는지' 생각하게끔 만드는 에너지가 있었다.  


당신의 단어는 무엇인가. 당신 언어의 시그는 무엇인가. 내가 어떤 단어를 자주 쓰는 딱 하루만 의식해봐도 찾을 수 있다. 물론 당신이 3분의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단어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도구다.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면 나이나 직업을 말하지만 자신만의 단어야 말로 자신을 설명해줄 가장 좋은 소개이다. 디자이너가 철학을 갖고 만든 명품 옷에 시그니쳐 문양이 있듯 당신 언어에도 그런 문양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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