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리뷰,
그리고 김태리의 명대사 한 마디
<미스터 션샤인>이 역사의 격정적 소용돌이 속으로, 새드엔딩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조선은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한때 햇살처럼 빛났던 '러브'는 검은 재로 변해버렸다.
지난 20화에서는 일본의 극악한 만행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애신(김태리 분)의 가문과 의병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애신은 더이상 애기씨의 고운 옷을 입지 않는다. 의병 고애신은 검은 옷을 입고 이제 불꽃 속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갔고 유진에게선 몇 걸음 더 떠나왔다.
<미스터 선샤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불꽃'이다. 이 낱말은 애신의 것이다. 불꽃은 고애신의 삶이자 정신이며, 이 드라마에 깔린 함축적 주제다.
지난달 방송한 9화에서는 유진이 묵는 글로리 호텔에 처음 방문한 애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깊은 속이야기를 나눈다. 유진이 뮤직박스에 얽힌 어린 시절의 고달팠던 이야기를 털어놓자 애신도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유진에게 들려준다. 애신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진 "안 하면 될 것 아니오. 양복 입는 일을.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
애신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봐서 알 텐데(웃음).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껜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나는 애신의 마지막 말에 감명받았다. "난 그리 선택했소"라는 대사 말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대사들은 신선하고 어떤 면에선 시적인데, 그중 명대사 하나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대사를 고를 것이다. '나'와 '선택'이라는 두 단어에는 퍽 많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독립적 의식과 '선택'이라는 주체적이고도 책임감 있는 의지에서 의병 애신의 진정성을 보았다. 더군다나 이것은 조선 사대부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한 번도 '나'인 적 없었고 한 번도 스스로 무얼 '선택'해 본 적 없었던 그 시절 여인의 입에서 말이다.
나는 고애신이란 캐릭터에서 인문정신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발견했다. 그런 점에서 고애신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한 가장 빛나는 답이다.
애신의 말에 유진의 독백이 다음처럼 이어진다.
유진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한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셉,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지난 20화에서도 "참 못됐습니다"로 시작하는 똑같은 독백이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애신을 오랜만에 만난 유진은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유진은 점점 애신의 불꽃 속으로 함께 걸어들어가고 있다. 다리 위에서 유진은 점점 달아나려하는 애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가는 방향으로 내가 걷겠소."
유진은 일본군 대좌 모리 타카시(김남희 분)에게 "너 지금 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서 있다"는 경고를 듣지만 이제 그 걸음을 돌이킬 순 없다. 아마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애신과 유진이 처음 마음을 열고 함께 걷던 길에서, 그리고 후에 갔던 바닷가에서 애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애신 "고맙소.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 나에겐 다시없을 순간이오 지금이."
"아마도 내가 헛된 희망을 품게 되나 보오. 다음엔 더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그런 다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희망 말이오."
애신과 유진이 함께 들어가는 불꽃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헛된 희망이 있을까 새드엔딩이 있을까. "눈처럼 아름답게/ 그대와 나, 그 끝에서/ 늘 이렇게 웃고 있길"이라는 이 드라마 OST '불꽃처럼 아름답게'의 가사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두 사람이 같은 쪽으로 나란히 걸으며 션샤인처럼 웃고 있길 바란다.
기사입력 18.09.11 09:55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손화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