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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13. 2015

넓게 파야 깊게 판다




넓게 파야 깊게 판다
: 전문인(專門人)보다 전인(全人) 되기





“나는 깊이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 스피노자






어떤 말은 운명처럼 내게 온다.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타이밍으로 내게 와 주는 말을 만나면 그 인연에 깊이 감사드리게 된다. 대학생 때 인연이 닿은 말이 있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었다. “나는 깊이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이 문장을 만나고 오래 이어오던 고민이 깔끔히 해결됨과 동시에 앞으로의 삶의 밑그림도 윤곽이 잡혔다. 그 시절 나름의 내 고민은 “다독이냐, 정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물론 다독과 정독이 대치되는 개념도 아니고, 다독을 하면서 정독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당시의 나는 양적독서와 질적독서 중 콘셉트를 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스피노자의 문장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결정을 유도했다. 30살이 될 때까지는 양적독서를, 그 이후에는 질적독서를 하기로. 그러니까 30살까지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고루 한 번씩만 읽고, 30살 이후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면서 새로운 책도 병행해 읽기로 한 것이다. 일단 넓게 파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나의 ‘삽질’은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자유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주장했다. A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A만 열심히 공부할 게 아니라 B를 알아야만 A의 정확한 모습이 보인다고. 다독을 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 그 지식들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 준다. B를 읽지 않고 A만 반복해서 읽는다고 A를 깊게 읽고 이해하는 건 아니다. 그런 ‘삽질’은 처음엔 잘 파고 있는 것 같지만 파면 팔수록 옆의 흙들이 자꾸 쏠려 내려와 도통 깊어지지가 않는다. 깊게 파기 위해선 먼저 넓은 범위의 땅을 고루 파기 시작해 점점 중심부를 좁혀가며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스피노자의 문장은 삶의 밑그림에도 영향을 끼쳤다. 늦게 취업을 하더라도 젊은 시절에 많은 경험을 해볼 것인가, 아니면 빨리 자리 잡고 취직해 전문가로서 역량을 키울 것인가에 대한 나의 고민 역시 ‘일단 넓게 파기’로 귀결됐다. 30살까지는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면서 나에게 잘 맞는 일을 찾고, 30살 이후에는 하나의 일에 집중해 깊이를 키우기로 했다. 사실 여자 나이 25살이면 취직을 하고 30살이면 대리를 달 나이인데 나는 그런 사회의 룰에서 한 발 비켜 서있다. 단 한 번도 후회를 안 했다고는 말 못하나,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에세이를 쓰면서 느끼는 건, 과거 방송진행을 했던 경험, 스피치 강사를 했던 경험, 기자일을 했던 경험 등이 하나로 모아져 꽤 좋은 패를 이루고 있다는 확신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전문인(專門人)이 되기 전에 전인(全人)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봤다. 전문인이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생각을 해내는 건 전인이고, 전문인 이상의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도 전인이다. 다산 정약용은 행정가이자 사학자였으며 교육학자, 기계공학자, 토목공학자, 지리학자, 법학자, 의학자, 국어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는 단순히 도구를 만들어내는 기술자(전문가)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을 전인인 정약용이 해낸 사례이다. 정약용을 보면 융합적, 복합적 사고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조각·건축·수학·과학·음악·철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한 전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방면의 지식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기적이 일어난다. 전인에게는 특히 이러한 창의성이 두드러진다. 


바야흐로 전인적인 지식이 중요해진 융합의 시대다. 다양한 책을 읽고,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사고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경계인의 시각에서 어느 편에도 기울어짐 없이, 얽매임 없이 사고한다면 깊이 있고 힘 있는 말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건축물’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건축 말고 다른 것엔 관심 없는 건축가(전문인)는 당연히 건축 자체에 대한 강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전인이라면 이 주제에 대해 건축뿐 아니라 역사, 지리, 문화, 정치, 예술 등 다각도에서 접근한 참신한 건축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입체적인 사유를 끌어내는 쪽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손에 쥐고 있는 삽을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지금 당신의 땅은 넓게 파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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