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리뷰
신해철의 자전적 고백,
그가 젊음을 위로하는 방식
[노래리뷰] 고 신해철의 곡 '백수의 아침', '나에게 쓰는 편지'
책꽂이에 잘 꽂아놓은, 버릴 생각 없는 책. 고 신해철의 곡들이 꼭 이런 책 같다. 못 버리는 건 1달 후, 1년 후, 그리고 10년 후에 다시 읽기 위해서다. 살아가며 경험치가 쌓이면 비로소 이해되는 그런 종류의 책들. 어린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어도 커서 사랑을 경험해보고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삶을 경험한 만큼 새롭고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민물장어의 꿈', '일상으로의 초대' 등 신해철의 많은 히트곡들이 모두 '버릴 수 없는 책'이지만, 오늘 리뷰로 덜 알려진 곡을 포함해 다른 두 곡을 꼽아봤다. '백수의 아침'과 '나에게 쓰는 편지'가 그것인데, 가사를 천천히 살펴보면 '인생의 그 단계를 살아내야지만 와 닿는 것들'이 개인적으로 이 두 곡에 있었다.
그리고, 10월 27일은 고 신해철의 4주기이기도 하다.
'백수의 아침'은 신해철이 2000년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의 새로운 밴드를 꾸리고 12월에 발표한 1집 <비트겐슈타인>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오버액션 맨' 등 다른 수록곡들에 비해 비교적 가사가 얌전(?)하다. 젊은 청년 백수들에게 영원히 공감될 이 노랫말은 백수 경험 없는 인생이라면 100%는 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일 것이다.
"세상은 내가 없이도 잘만 돌아가고 있지만/ 난 한방 터뜨릴 거야 좀만 기다려봐/ 조만간 기대해봐 아하아아하"
"세상이 나를 몰라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을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까"
눈치 보이고 힘들긴 해도 '한방 터뜨릴 것'이란 포부가 있던 그때. 당시엔 고통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백수였을 때만큼 꿈으로 마음 부풀었을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신해철의 이 곡은 그때의 내 마음을 스캔당한 것처럼 정확하다. 이런 허세가 내게도 있었다. 난 한방 터뜨릴 만한 잠재력이 충분한 사람인데 이런 원석을 세상은 왜 몰라볼까? 이거 대체 무슨 영문이지? 싶은 마음 말이다. 이렇게 어리둥절하다가도 그 다음날은 또 '아무래도 내가 문제인 것 같다'는 확신이 선명하게 올라오곤 하던, 매일 두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쨌든 뭐가 되든 언제 되든 되긴 될 테니까 보라니까/ 믿거나 말거나 나의 때는 곧 와/ 언제일지 모르지만 난 자신이 있어/ 내가 허풍 좀 센 건 나도 인정해/ 내게서 그걸 빼면 뭐가 남겠어/ 신날 때 재 뿌리지 마/ 사실은 나도 좀 초조해"
신해철의 솔직함이 좋다. '나도 좀 초조해'라는 짧은 무너짐이 피식 웃게 한다. 실컷 허풍을 떨다가도 그걸 한 순간 주눅 들게 만드는 재가 뿌려질 때면 짜증이 난다. 백수는 신날 때 제대로 신나하지도 못하는 신세인 건가 싶어서 말이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언젠가는 나의 때가 와!' 하고 당당하게 말하다가 불안한 속내를 아주 살짝 내비치는 인간미란!
여기서 잠깐 딴 길로 새자면, 신해철은 왜 그때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의 밴드로 활동했을까? 비트겐슈타인이란 철학자는 신해철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신해철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일까? 20세기의 니체에 비유될 정도로 천재적이고 강력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밴드명으로 내세운 건 그의 지적 허영이었을까? 하지만 그 앨범에는 예상과 달리 거칠고 야성적인 곡들이 채워져 있어, 지적 허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신해철이 그 철학자를 사랑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추측을 해본다. 왜냐하면 생전 신해철의 '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날카롭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뚫어보는 정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언어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넘사벽' 천재였다. 그리고 신해철은 '언어'에 있어 탁월한 감각을 보였던 달변가였다. 라디오나 TV에서 노래가 아닌 '말'로서 보여진 신해철은 '문맥을 아는 자'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 철학 논고> <철학적 탐구> 등 자신의 저서에서 강조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완전히 똑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그것을 모두 다른 의미로 쓴다는 것, 그러니 결국 그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문맥을 먼저 파악한 후에 단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예민한 언어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아무튼 신해철의 독설은 잠든 정신을 깨우는 도끼 같은 면모가 있었다.
자, 샜던 길에서 다시 돌아와 인생의 단계마다 다시 들리는 곡 두 번째 순서로 '나에게 쓰는 편지'를 살펴보려 한다. 1991년 3월 발매된 신해철 2집 < Myself >의 수록곡인 이 곡은, 백수를 지나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 고민들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하다. 어릴 땐 안 보였던 것이고, 백수였을 때 들었다면 감흥이 없었을 가사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물론 누구나 다 고민하는 주제다. 진정한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진리다. 문제는 와 닿는 정도인 것 같다. 살면서 내가 느낀 아이러니 중 하나는 돈을 벌기 시작하면 더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백수를 벗어나 돈을 벌면 경제적 자유를 느껴야하는 게 맞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오히려 돈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이 돈으로 살기 힘드니 부동산을 좀 배워야 하나? 주식이라도 좀 해야 하나? 하고 말이다. 살다보니 돈과 행복이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밀접한 관계가 돼 있다. 가사 속 '은행잔고, 돈, 큰 집, 빠른 차'란 단어들과 '행복'이란 단어 사이의 거리감이 한때는 안 보였지만 다시금 보인다. 그리고 한때 갈망했던 돈 말고, 요즘은 더 예쁜 행복이 보인다.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신해철은 가사에서 이렇게 정답을 제시했다. 행복이 부와 명예, 안정 안에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소중한 것들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신해철의 노랫말에 진짜 행복의 정체를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다.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 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란 맨 끝 가사가 역시 솔직해서 좋고 솔직해서 위로가 된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 이런저런 삶의 철학들을 담은 신해철의 노래들은, 노래이기도 하지만 한 권의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며 '그때'가 됐을 때 비로소 와 닿을 또 다른 그의 노래를 만나게 될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다.
기사입력 18.10.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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