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단순

by 손화신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photo-1516794840430-8d8c51e7c045.jpg



세밑, 사주팔자의 시즌이다. 신년운세 같은 거 끊은 지 한참이지만 나는 명리학, 관상, 별자리, 운명... 그런 신비를 웬만큼은 믿는다. 신비를 믿지 않는다면 인생은 현실만 남은 고구마일 테니까. 아무튼 내가 점이나 평생운세를 안 보게 된 건 운명이란 배를 운전할 키 조작법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운명이란 배는 정해진 큰 항로를 벗어날 순 없지만 어떤 항로를 지나든 그 길을 덜 흔들리며 순항할 순 있다고 본다. 키를 야무지게 잡고 운전을 잘하면 된다. 키를 잡은 선장은 나. 키 위에는 '안전운전' 대신에 이 구절 하나를 붙이면 좋겠다.


"걱정도 팔자다"


이것이 운명의 배를 순항하게 해주는 '키 조작법'이다. 걱정을 하고 안 하고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 속담에 따르면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팔자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처음엔 조금 어렵고, 하다 보면 쉬워진다.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는 건 이상한 습관이다. 이게 진짜 '이상한' 짓이란 걸 스스로 각성해야지 걱정을 안 하는 습관을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보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하더라. 자기는 20대 초반에 '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됐을 때 나의 늙은 외모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고. 그런데 20대 후반인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늙는 것에 별로 두려움도 없는데 그 이유는 "그 고민이 진짜 '이상한'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게 이유다.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겠나. 늙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둥, 멋있게 늙어가는 것도 설레는 일이라는 둥, 그런 말은 제발 집어치우길. 늙는 건 언제나 싫지만 그렇다고 안 늙는 건 아닐 테고 따라서 '늙으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은 한 마디로 '하는 게 이상한' 생각이라는 거다.


물론, 좀 어렵다. 새해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니 달력이라도 찢어서 새해를 없애버리고 싶긴 하다. 그렇지만 '걱정이 팔자가 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한 이상 애써보려는 거다. 이상한 걱정, 안 해도 될 걱정, 그리고 할 법한 고민까지도 되도록 안 하는 쪽으로 키를 운전하고 있다. 자동차 운전도 계속 할수록 핸들조작이 쉬워지는 것처럼 이것도 쉬워지겠지 하면서. 무엇이든 계속 하면 하는 게 더 쉬워지고, 계속 안 하면 안 하는 게 더 쉬워지는 거니까.


나는 태생이 걱정인형이다. 보통 '걱정'이라고 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염려하는 걸 말하지만 나는 여기에 더해 지나간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고민이라는 단어가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자각이 들었다. '걱정만 안 하고 살아도 삶의 퀄리티가 달라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강렬하게 내 안에서 올라왔다. 그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을 '알아차리'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멀리 던져버리려고 하고 있다. 걱정이라는 건 지나가는 개에게 주는 거다, 내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뇌었다.


걱정 안 하는 버릇을 가지려는 건 일단은 내가 억울해서다. 낮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되는 말을 들었을 때 저녁까지 기분이 처져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래서 내 일에 제대로 집중을 못할 때, 그게 너무 억울했다. 왜 내가 그 사람의 한 마디 때문에 나의 저녁시간까지 망쳐야 하지? 이건 내 시간인데. 그런 자각이 들었을 때 '이제부터는 외부에서 오는 것들은 그때그때 털어버리자' 다짐했다. 내 안에 접시 하나가 있는데 그걸 똑바로 놓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여놓아서 음식들이 다 흘러 떨어져버리게 만드는 거다. 담아놓지 않는다는 건, 내게 있어 마치 '혁명' 같은 일이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건 걱정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꽁하고 담아놓는가 싶다가도 만화가 시작하면 만화 외의 것들은 안중에 없다. 어린이 사주팔자 50% 할인 같은 광고를 본 적 없는 이유, 어린이의 사주를 점치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이미 이상한 걱정을 하느라 운명의 키를 잘못 운전하는 멍청한 짓은 안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털어버리는 단순한 자, 그의 사주엔 복이 있나니...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