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데구르르. 데구르르. 다른 친구들은 모두 앞구르기를 해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쫙 펼친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한 아이.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구르는데 왜 나만 안 되는지 모르겠다. 영원히 나만 못 구른 채 이 자리에 서 있진 않을까 겁이 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분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은 한 직장에 5년도 다니고, 8년도 다니는데 나는 가장 오래 다닌 게 (버텨서) 3년이다. 이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남들 다 하는 걸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 내가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을까 불안했다. 완벽한 직장이 어디있겠니, 힘들어도 견디고 하는 거지, 이런 말들이 어느 정도는 맞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퇴사는 언제나 새 희망으로 다가왔다.
안정적인 것들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싶은 생각이 어느 순간에 꼭 찾아왔다. 여기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없겠다, 이 일이 이제는 재미가 없다, 이 일이 세상에 유의미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새로운 문을 하나 열고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한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올까 말까 하는 세상에 이 변덕을 가지고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룰 수 있을까 걱정은 계속됐다. 나란 사람 이상한 사람, 이런 정의를 스스로에게 종종 내렸다. A를 바라보면서 B에 곁눈질하고, C에 손을 내밀면서도 D를 안고 싶은 게 나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생각의 60% 정도를 몇 달 전에 안드로메다 은하로 보내버렸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았기 때문이다. 글쓰기만큼은 5년이고 8년이고 80년이고 계속 '이어가고' 싶어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 게 내게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더 이상 자신이 '부적응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길이라면 나도 '계속 걷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불안은 반쯤 증발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이 조직생활 형태로 하는 일이 아닐 뿐이었다. 일이라는 게 꼭 '직장'에서 해야하는 것이라는 낡은 생각을 버렸을 때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는 이 집 가서 신세졌다가 저 집 가서 신세지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떠돌아다녔는 이제는 작지만 내 집이 생겨서 그 안에 들어가서 누운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내 집에서 나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가며, 나의 재미를 찾으며 살아보고 싶다. 돈 버는 데 재미가 무슨 상관이냐, 일이란 건 원래 재미없는 거고 그럼에도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벌어서 그 돈으로 여가시간에 재미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이런 기존의 생각 룰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재밌는 것을 좇는 것에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다.
나는 즐겁고 싶다. 일에서도 즐겁고 싶고 일 아닌 것에도 즐겁고 싶다. 내 삶이 한순간도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 재미 앞에서 진지해지려 한다.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그만 둘 거다. 책임감이 없다고? 이게 나의 책임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쉬는 것.
인생을 불안정하게 살 거냐고? 이게 나의 안정이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저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안정된 삶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예전에는 머리로 이해했지만 이젠 피부로도 알 것 같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시작할 때 이미 그 일의 끝까지 깊은 안정성이 보유돼 있다는 그의 설명이 조금씩 체험으로써 이해되고 있다.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이미 안정성은 그 안에 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나를 어릴 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어떤 사람도 재미없는 일을 하면서 꾸역꾸역 사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 적 없을 것이고 원한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이 원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아이유 분)이 박동훈(이선균 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하고. 부양할 식구가 있다는 건 90%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10%의 핑계이기도 하단 걸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재미없는 일을 그만두는 건 죄가 아니다. 어릴 때 친구랑 놀면서 "이 게임 이제 지루하니까 다른 게임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건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었고 그 말을 했다고 친구가 나를 이상한 아이로 보지도 않았다. 나는 자연의 법칙을 목격하듯 앞으로 이것을 목격할 것 같다. 언젠가는 재미가 내게 밥도 먹여주고 좋은 사람들도 이어주고 더 넓은 세계의 문도 열어줄 것을.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