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5살 때는 3명, 10살 때는 20명, 18살 때는 200명, 28살 때는 1000명... 나이가 들수록 비교대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대상은 주변인에서 끝나지 않고 미디어까지 가세해서 나의 무의식 바닥부터 잠식해갔다. 내가 난데,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없는데도 가끔 움츠러들기도 하고 어떨 땐 화도 났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왜 저들보다 시간적 여유도 없고 명예도 없고 돈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죽여야 한다. 한 철학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100명이었던 비교대상을 50명으로 줄이고, 20명으로 줄이고 3명으로 줄이고 마지막 남은 1명까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버겁게 100명을 다 데리고 살지 말라고. 그렇게 죽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에 그건 피할 수 없는 작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변 친구든 TV 속 연예인이든 비교대상을 1명도 남겨두지 않고 싹 제거해야지 내가 나로 당당하게 살 수 있다. 사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마지막 1명까지 완전히 제거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자존감이란 단어는 묘하다. 자신을 존중한다는 말이 내게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나는 이 단어를 일부러 안 쓰게 되는데 왜 그런가 생각해봤더니, 자존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출일 때가 있어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나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기제로써 자기를 존중하려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이상하게 나는 자신을 스스로 높이면서 지키려는 사람보다 자신을 쿨하게 디스하는 사람이 더 자존감 있어 보인다. 누군가와 자기를 비교하지 않으니까 자신에게 조소를 날려도 내가 더 낮아질 리 없고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해' 이런 생각일랑 애초부터 가진 적도 없다. 비교대상을 마지막 1명까지 다 죽인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워 어떨 땐 자신을 한껏 높이기도 하고 어떨 땐 자신을 한껏 낮추기도 하고, 정해진 행동양식이 없다.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내가 난데, 높여도 낮춰도 나는 변하지 않으니까.
아이들도 친구와 자신을 비교해서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엄마에게 떼쓸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체로 뻔뻔하고 믿는 구석 없이도 당당하다. 비교대상이 겨우 3명뿐이어서일까? 자기가 천재라느니 아이큐가 280이라느니,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내가 제일 밥도 많이 먹고 내가 제일 그림도 잘 그린다느니 큰소리다. 귀엽다. 되게 자연스럽고 건강해 보인다. 크면서 내가 배운 '겸손'은 사실 어린이 같은 당당함을 감추려고 애써 지어낸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겸손은 스스로 우러나지 않는 이상 되레 오만이 아닐까.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서도 이건 거짓이다 싶은 때가 있다. 자기 자랑도 싫지만 자기 겸손도 똑같이 의식되는 요즘은 가장 솔직한 반응이 뭘까 생각하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하지 않는 편이다.
좀 뻔뻔한 게 차라리 자의식 없이 순수해 보인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있단 생각에서 나오는 뻔뻔함 말고, 나의 어떤 점이 스스로도 좋아서 뽐내려는 아이 같은 태도 말이다. 겸손한 말을 하는데도 거만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랑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겸손이 묻어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건 잘 감춰지지 않나 보다. 아마도 자기 안에 비교대상을 몇 명이나 데리고 사는지, 그 인원수에 달렸지 싶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