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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Dec 31. 2018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초월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 루시드 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삶이 우리를 묶어두는 끈은 죄책감이다. 특별히 살인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루시드 폴의 노래처럼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나는 누군가와 헤어짐의 편지를 주고받을 때 이런 말이 가장 애틋하다. '나도 모르게 네게 상처 준 것들이 있다면 미안해'라는 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과를 건네는 마음. 무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타인의 세계에 뿌려진 자신의 죄를 감지해내는 서글픔. 이런 글을 받았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는 필시 죄인이겠구나 싶어 숙연해진다. 


나는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매 순간 친절하게 대했다고 확신하지만 새벽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명확함으로 타인의 마음속에서 나의 죄는 밝아올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한 순간 나를 스쳐간 누군가조차 나에게 상처 받고 마음 베였을 것이다.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그 노랫말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나의 무력감이 마치 노끈처럼 견고하다. 그것은 진창에 나를 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끈에서 이제 그만 놓여나려 한다. 내가 죄인인 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사실이지만 감옥 안에서도 언제나 자유 비슷한 것, 행복 비슷한 건 있다. 감옥이 아니라 더한 곳, 지옥의 끝에서도 그것들은 존재하고 그 자유의 끈을 움켜쥘 수 있는 선택권은 언제나 내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져도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도 짓고 살지만 사랑도 지어가며 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엄마와 둘이서 충북 단양에 놀러 갔다. 남한강도 보고, 고수동굴도 가고, 아쿠아리움도 구경하고, 산 정상에 있는 카페도 가고, 선사유물도 보고, 휴게소에서 우동도 먹고, 시장에서 순댓국도 먹고, 찜질방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목욕도 하고 사람들에 섞여 잠도 잤다. 예고 없이 훌쩍 떠난 여행이라 숙소도 못 구하고 맛집을 조사해놓지도 못했지만 어떤 여행보다 완벽했다. 차에서 엄마가 문득 "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시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이런 구체적인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잘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항상 갖고 사는데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은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잘못을 주는 만큼 그만큼의 행복도 엄마에게 내가 주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산의 등줄기로 내려앉던 햇살이 내 자리까지 와주었다. 응달에 오래 머물던 죄책감이 눈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어떤 책에선가 죄책감을 없애는 것은 '의식 혁명'이라 부를 만한 거라고 쓴 걸 봤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안고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죄책감을 툭툭 털어버리면서 사는 것이 나쁜 게 아닌데도 태고의 무엇이 핏속에 흐르는지 그러지를 못한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만 자각하면 쉬운 일인데도, 이 작업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피치 못하게 잘못을 했다면 그 순간에 미안함을 깊이 느끼기. 그거면 됐다. 거기까지면 됐다. 죄책감을 자기 인생 위에 쌓아올릴 것까지는 없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죄책감이란 끈에 묶인 채 얌전하게 가라앉는 대신 쾌활함을 택한다. 거리를 뛰어다니고 죄인이 아닌 주인으로 홀가분하게 산다. 우리도 어린이가 그런 것처럼 그 끈을 놓아버려도 괜찮다.      


나의 경우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죄책감을 피하는 쪽에 주안점을 두는 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 이 생각으로 접어두는 말들이 많다. 그런데 내 행동의 메커니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내가 상처 줬다는 죄책감을 느낄까봐 그걸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단단하지 못한 내 마음이 죄책감으로 상처 받을까 봐, 자신이 먼저 걱정됐다. 그래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을 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설 때면 차라리 내가 상처 받는 쪽을 택할 때가 조금 더 많다. 나 자신을 잘 몰랐던 예전에는 반대였다. 절대 남한테 손해 입고 살면 안 된다는 걸 학습받아왔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게 더 잘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나면 오히려 내가 더 괴로웠고 외려 더 손해 입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젠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는지도 안다.


나는 자주 초월을 상상한다. 그것은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이미지다. 현실이 갑갑할 때 산 정상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은 일이 되어버린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쌓아가게 되는 죄책감들도 사실 산 위에서 있는 절대자의 시선으로 보면 귀여운 것들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한다. 자유와 초월을 꿈꿀 때 내가 가장 먼저 버리는 건 죄책감이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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