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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Jan 03. 2019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타인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어릴 때는 남들 구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7살짜리가 구할 만한 것이 세상에는 딱히 없어서 화면 안으로 들어가서 황금박쥐가 되어 적을 무찔렀다. 나는 칼을 휘두르거나 영웅이 되어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류의 프로그램을 봐도 아이들이 많이 하는 말은 대략 이런 것이다. 


"만세야 조금만 기달료 밍구기가 구해줄게!!"


미끄럼틀 위를 기어올라가는 민국이의 결연한 의지를 보았을 때 나도 누군가 구해주고 싶은 어릴 적의 의욕이 솟아남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구해줄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타인이 아닌 것처럼 돼버렸다. 나는 나를 구하느라 언제나 바쁘다. 내 앞가림도 벅차다는 그 어른스럽고 이기적이고 쿨한 말을, 설령 혼잣말이라도 내가 뱉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생각과 다르게 흘렀다. 어디서 '오지랖'이라는 합리적인 단어를 구해와서는 '그래, 이건 오지랖인 거지' 하고 타인의 문제에 애써 관심을 끄곤 했다.  


"밍구가 나를 빨리 구해주겠니. 어서 나를 도와주겠니. 조금만 힘을 내주겠니."


어린이 때는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도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도움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어릴 땐 타인의 어려움에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였으나 지금은 타인의 어려움을 목격하는 것과 내가 행동으로 개입하는 것 사이에 온갖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오버하는 거면 어떡하지, 저 사람이 원하지 않는 도움이라면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도 있어, 내가 해야 할 일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왜 저 사람을 도와야 하지, 저 사람을 도와주면 저 사람이 고맙다고 말해줄까... 


세상에서 '타인'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사르트르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라 그들의 시선은 우리를 가두고 내가 나로 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말처럼 타자는 나 자신의 존재근거를 도출하게도 한다. 인간은 타인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미를 혼자서 찾기도 힘들다. 이러나저러나 타인은 지옥으로써든 무엇으로써든 나와 단절된 다른 세상일 수 없고 나는 타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타인의 호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자잘한 실수를 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잘못을 문제 삼는 대신 용서하고 덮어준다. 내가 받은 용서는, 다른 날 반대의 상황에서 내가 타인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이렇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면서 살아간다. 


어린이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특별히 나누지 않는다. 타인뿐 아니라 우주와 자신도 무경계에 놓여져 있다. 용사라도 된 듯 친구를 돕고 구하는 데 자신의 몸을 사리는 법이 없다. 그러다가 크면서 점점 자신과 타인, 자신과 세계를 경계 짓기 시작하고 경쟁사회에 내몰리면서 더욱 타자를 타자로써 구별 짓게 된다. 어른들은 '내 사람들'에겐 헌신적이지만 '남'에게는 매정해지고 본인이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단 사실도 잊어버린다.


뉴스에서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의 소식을 접할 때 많은 생각이 든다.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저렇게 행동했을까.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내면 깊은 곳의 용기를 끌어올려 그것을 타인을 위해 쓸 수 있을까. 나는 타인이라는 지옥 혹은 파라다이스 속에서 어린이처럼 무모할 수 있을까. 


어린이는 약하지만 용감하고 어른은 강하지만 용감하지 않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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