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나의 색깔 찾기'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3. 어떻게 쓸 것인가: 나의 색깔 찾기
#5. 비논리적으로 쓰기
나는 기자일을 하고 에세이를 쓰면서 글을 너무 '잘 쓰게' 됐다. 이게 무슨 자화자찬 멍멍소리냐 하시겠지만 이것은 꽤 진지한 고백이다. 내 글은 점점 주술관계의 어긋남이 없어지고 정확하고 깔끔한 문장이 되어갔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었는데, 이제는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나를 바꾼 책들, 내 인생을 흔들거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문학들은 대부분 정확하고 어긋남 없는 글이 아니었다. 소설들은 비현실의 단어들로 적혀 있었고 시들은 주술 관계는커녕 조사도 말이 안 되게 쓰여져 있어 문장들은 삐그덕거렸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런 세상을 보여주는 문학들을 동경해왔지만 기사를 쓰고 논리적인 톤의 에세이를 쓰면서 점점 현실적 글쓰기에 매몰되고 말았다.
명료하게 쓰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다만 그 명료함에서 요즘 많은 한계를 느끼고 있단 걸 털어놓는다.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있으면서 에세이에 대해 한계를 느낀다고 털어놓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요즘 새 메거진을 쓰면서 내가 깊이 느끼는 건 '이런 글의 한계'다. 명료한 글은 명료한 세계를 표현해내지만 행간에서 피어나는 신비 같은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는 "사랑한다"는 명확한 말보다는 나를 향한 사랑이 감춰지지 않아서 새어나오는 찰나의 행동에서 더 또렷한 사랑을 느낀다. 그런 글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요즘이다.
비현실적으로 쓰기. 비논리적으로 쓰기. 내가 뛰어들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의 입장권이다. 말이 안 되게 쓸 것. 문장을 어긋나게 할 것. 리듬에 균열을 내서 삐그덕거리게 할 것.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법한 단어들을 붙여놓아 볼 것. 이런 것들이 그 세계에서 내가 할 일들이다. 분명하게 느끼는 건 현실의 문장들로 현실 너머를 보여줄 수도 없고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해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정신줄을 느슨하게 풀고 써야 오히려 영감으로 충만한 글이 된다.
기사를 쓸 때 딱 한 번 이상한 경험을 한 적 있다. 드라마 <도깨비>를 재밌게 보고서 리뷰글을 한번 써보고 싶단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그걸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을 때 좋은 생각들이 쏟아지는 경우가 많다. 잠의 세계에서 번쩍이는 영감들을 자루 안에 가득 훔쳐다가 현실세계로 돌아온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 자루 안에 담아온 것들을 꺼내면서 근사한 것들은 수첩을 열고 급하게 적어놓기도 한다. 새로운 비전들, 샘솟는 신성한 아이디어를 막 깨어난 정신의 몽롱함 속에서 종종 얻곤 한다. <도깨비> 기사를 쓸 때도 이런 경우였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생각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오르는 걸 느끼고서 암막커튼도 열지 않은 채로 방불도 켜지 않은 채로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마구 두드렸다. 비몽사몽으로 기사의 초안을 쭉 써내려갔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맡겨 놓은 글을 찾는 사람처럼 어딘가에서 생각들을 받아서, 단지 받아적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쓴 기사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내 짧은 기자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기사 하나를 꼽으라면 이 기사를 꼽겠다. (<도깨비> 결말이 궁금해? 김은숙이 깔아놓은 '복선들')
<도깨비> 리뷰글이 비논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이었던 건 아니다. 그것을 쓰는 방식이 그랬다는 거다. 내가 생각해내서 써내려가는 기분이 아니라 나의 너머에 있는 누군가 알려줘서 쉽게 쓰여지는 기분, 쓰면서도 '이 글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자아도취적인 무엇이 아니라 마치 남의 글을 읽으면서 좋다고 말할 때와 비슷한 뉘앙스였다. 이 경험을 하고 그 후에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게 됐는데 내가 <도깨비>를 쓸 때 경험한 게 이거였구나 싶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을 쓸 때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도 말고, 써놓고 나서 많이 고치지도 말하고 한다. 첫 생각을 놓치지 말고 붙잡은 다음 그걸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는 주문이다. 계속 손을 움직여서 첫 생각이 피어낸 그것의 심장부로 전사처럼 깊게 돌진해야 한다. 생각하려 들지 말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도 버리라고 말한다. 벌거벗고 있다고 느껴지겠지만 자신의 내면을 검열하지 말고 사회적 체면 따위도 의식하지 말고 써보라는 거다. 첫 생각에는 엄청난 영감과 에너지의 불씨가 들어있는데 그 불씨를 자기검열과 정돈된 이성으로 꺼뜨리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칼주름으로 다려진 유니폼 같은 글만 써왔다. 그런데 이젠 사복으로 갈아입고 싶어졌다. 내 개성이 묻어나는 후드 점퍼에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서 조금은 풀어진 자세로 앉고 싶다. 무의식을 꺼내서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괴상한 글도 쓰고 싶다. 그런 중에 내가 지금까지 글에 대해 내 생각을 썼던 것, 강연에서 했던 말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간결한 문장이 내 자랑이었는데, 요즘은 간결하게 써야한다는 생각의 포로가 된 나를 바라본다. 정갈한 문체로 쓰려하니 신비로운 문장들이 흘러나오질 않는다. 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1차원적인 세계에 묶여있다. 아, 발터 벤야민이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던가!
“생각은 영감을 죽이고, 문체는 생각을 묶는다.” (발터 벤야민)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도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나 아이처럼)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참된 작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경고음을 셀 수 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경고음을 작동시키면 귀여운 오달리스크가 벌떡 일어나 이것저것 마구 뒤섞여 있는 규방에서, 즉 우리들 뇌의 상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을 거칠게 낚아채 어깨에 두르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우리 앞을 빠져나가 사람들에게로 도주한다. 그러나 그렇게 왜곡되고 쫓긴 상태에서도 승리에 차, 사랑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기 위해서 그녀는 얼마나 잘 구성되어져 있으며 얼마나 건장하게 구축되어져 있어야 하는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 '긴급 기술 지원대', p.148)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몇 년을 그렇게 고민하고 연습했더니 문장은 나날이 좋아졌다. 최근까지도, 5년 정도는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폭발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평생 논리적 글만 쓸 게 아니라면 정확하고 탁월하고 정갈한 글을 쓰고자 하는 이 열망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작품'을 쓰는 것과도 그것이 별개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심연에 든 무언가를 거칠게 낚아채서 어깨에 두르고 달아나는 그 오달리스크를 붙잡는 게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이다. 오달리스크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고서 진실한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