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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Jan 12. 2019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충만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금만 더 머물다 가자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중)


천국의 주인은 머무는 사람이어서 "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자"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곳에서는 아이도 어른도 머물 수밖에 없다. 집에 가야 해, 집에 갈 시간이야, 말해도 어린이는 쉽게 동물원을 떠나지 못한다. 사슴의 눈을 계속 보려고 하고 고래의 다음 비상을 한 번 더 보려고 기다린다.


아이는 자기의 천국에 더 머물기 위해 울고 떼를 쓰지만 어른들의 생활양식은 그런 게 아니다. 어른은 시계의 초침과 분침과 시침을 잘 떠나지 못한다. 우린 천국을 떠나온 지 꽤 오래고 돌아보니 길도 꽤 멀어졌다. 하지만 떠나지 못해 머무는 생활방식은 세상의 모든 거짓 속에서 진실한 것들을 가려낸다.


지금 보는 하늘의 구름이 근사하다면 그렇다면 머물러서 바라볼 일이다. 그 구름은 어제의 구름과 다르고 내일과 모레, 앞으로 보게 될 어떤 구름과도 다른 것이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장면이기에 지금 머물지 않으면 영영 놓쳐버리는 천국이다.


지금 마시는 커피가 황홀하다면 혀에 조금 더 머물게 하고, 그럴 때 나의 하루가 충만함을 얻는다. 많은 것을 눈에 담는 여행보다 하나의 풍경을 마음속에 오래 머물게 담아두는 여행을 하고 싶다. 파리를 떠올렸을 때 그곳의 갖가지 모습들보단 노천카페에 앉아서 가만히 응시했던 길바닥의 울퉁불퉁한 회색 돌이 떠오른다면, 그것도 참 괜찮겠다.


머무름은 스며듦이다.


햇살이 실내의 가구 위로 내려앉은 풍경을 좋아한다. 짙은 고동색 나무의자가 카페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거나, 창문 크기만큼의 네모난 햇살이 내 방 책장의 책들과 그 앞에 놓인 나무조각 인형을 비추고 있는 그런 사진들이 내 휴대폰에 많았다. 나는 특별하게 햇살을, 가구를 좋아한다기 보단 그냥 스며드는 풍경들을 좋아한다.


그것이 가구든 코트 옷자락이든, 내리쬐는 것이 햇살이든 달빛이든 상관없다.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에 가닿아 만나고 배어들고 하나가 되는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은 하나 더 알게 됐다. '스며든다는 것'은 단지 사랑스러운 풍경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었다. 공간이든 날씨든 사진이든 무엇이든 그것들을 내 안에 오래 머금고 있을 때 아름다움이 피어났다.


21살 때인가. 대학교 친구들과 경주에 놀러갔는데 자전거를 빌려서 한나절을 흘러 다녔다. 나무도 길도 기와지붕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어느 호숫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자갈돌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자갈돌처럼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호수에서의 세 시간은 내게 스며든 시간이었다. 천국의 문이 잠깐 열렸을 때 엿봤던 틈새의 풍경이었다. 호수로부터 불어온 경주의 바람은 지금 내게 머물러 있다.


스며든 것만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아이처럼 나는 무언가를 아는 것보다는 느끼는 것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머무름 속에서 삶에 깃든 사랑을 돌아본다. 시간 밖에 머물러 내 안에서 충만해진다.




목차_

01. 프롤로그_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

02. 주체_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

03. 망각_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

04. 하루_ 오늘 돌릴 팽이를 절대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05. 가치_ 돌멩이를 주웠는데 소중한 것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06. 자유_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

07. 사랑_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

08. 고통_ 나는 갑자기 슬픈 기억이 떠올라서 뒤돌아있겠습니다

09. 단순_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버렸습니다

10. 재미_ 이 놀이는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11. 당당_ 내가 제일 힘도 세고 밥도 많이 먹고, 천재입니다

12. 초월_ 죄책감은 강아지 옆에 있던 길냥이에게 줘버렸습니다

13. 타인_ 나는 용감하니까 내가 다 구해주겠습니다

14. 상상_ 수수께끼를 맞히면 피카츄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15. 충만_ 혹등고래 앞에서 저는 조금 더 머물다 가겠습니다

16. 에필로그_ 백 투 더 퓨처, 다시 어린이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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