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6. 믿음_ 산타 믿고 그냥 행복하겠습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기준이다. 어린이와 어린이 아님을 나누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레드컬러 의상을 풀 착장하시고 굴뚝으로 출입하시는 그분의 존재를 믿는 자, 그들을 우린 '진정한 어린이'라고 부른다. 어린이의 진정성은 이렇듯 오래도록 산타가 보증해왔다. 그들의 믿음은 티 없고 견고하여 자기 집에 굴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할아버지의 배가 굴뚝을 통과할 만큼 홀쭉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어도 당황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낸다. 우리집은 베란다 창문으로 오셨다며.
어린이는 '믿는 자'들이다.
얼마 전에 아는 언니와 그의 4살짜리 딸아이와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사 중에 총 3회 괴물이 출몰했다. 물론 내 눈에는 안 보였다. 아이는 밥상을 엎을 만큼 진지했다. "꺄윽~ 괴물이가 쩌기 나타나쇼요" 하면서 엄마 뒤에 숨었고 엄마는 같이 공포에 떨며 아이를 숨겨주었다.
그때 문득 TV에서 본 삼둥이가 생각났다. 공룡(탈을 쓴 사람)을 보고서는 몸을 벌벌 떨면서 셋이서 대성통곡하는데, 평소 같으면 '애들 너무 귀엽다' 하고 넘겼을 장면이지만 그날따라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내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아차 싶었다. 어른들이야 공룡이 가짜인 걸 알고서 저렇게 탈을 쓰고 으르렁대지만 저게 진짜 공룡이라고 믿는 아이들에게 그것이 어떤 상황일까 상상해봤다. '믿는 자'들에게 그건 오줌을 지릴 만한 극한상황이었을 거다. 믿는다는 건 그런 거니까.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를 겪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믿음이란 건 놀랍도록 강력한 마음의 힘이다.
아이들은 공룡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에 겁에 질리고, 산타가 정말 선물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그게 진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겪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할 뿐이다. 아이들은 보통 무언가를 믿을 때 순수하게, 1%의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믿는다. 그래서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이 단순하고 행복해보이는 건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어른인 나는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믿음을 갖기는 힘들지만 의도적으로 믿음이란 걸 이용해서 마음의 상태를 선택하곤 한다.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열흘이 남았을 때 나는 결과가 나쁠 거라고 믿거나, 괜찮을 거라고 믿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열흘의 시간을 마음 편하게 보내려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으면 된다. 결과는 어차피 정해진 것이니 결과를 맞히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다.
"왜 크면서 의심만 커가는지... 확신이 커져야 하지 않나요?"
- 영화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대사 중
어른이 되면서 모든 것을 의심해야 이 험한 세상 잘 헤쳐갈 수 있다고 교육받지만, 막상 살아보면 의심이란 것이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란 걸 느낀다. 생각보다 기회비용이 크다고 할까. 어떤 사이트에서 회원가입을 하면서 내 개인정보가 유출돼서 누가 나쁜 짓을 하면 어쩌나 갑자기 불안한 상상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럴 때 계속 의심하면서 불안해하거나 "에잇 괜찮겠지' 하고 빨리 넘어가거나, 두 가지 믿음 중 하나의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의심을 해야 안전하다고? 맞는 말이긴 하나, 나는 한 번의 안전보다는 구십 아홉 번의 마음 편함을 택하는 쪽이다.
믿음이라고 하면 보통 '나 자신을 믿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쓰지만 자신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 타인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손에 잡히는 행복과 더 긴밀히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굴>을 보면 주인공이 계속해서 굴을 파고 들어가는데 그게 줄거리의 전부다. 세상이 온통 위협으로 여겨지는 주인공에게는 완벽하게 안전한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굴을 팠는데 잘된 것 같다."
- 프란츠 카프카 <굴>
그런데 굴을 아무리 잘 파도 결코 굴 속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카프카는 서서히 보여준다. 바깥에서 식량을 구해서 굴로 들어가면서 지금 내 모습을 누군가 보면 어쩌나, 비밀이어야만 하는 나의 굴의 존재가 타인에게 알려지면 어떡하나 점점 불안은 증식해간다. 굴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다른 쪽에서 파고 들어오는 타인의 굴과 마주치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굴을 만들면서 안전함을 느껴야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파면 팔 수록 불안해지는 거다. 그냥 세상이 안전하다고 믿고 바깥세상에서 사는 게 나았다.
타인을 믿어서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타인의 선함을 믿고 먼저 친절을 주었다가 불친절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신으로 피폐해지는 것보다는 낫다. 굴은 결국 무너지게 돼 있다. 인간은 타인이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절대 건설할 수 없다. 그러니 타인을 믿지 못해서 에너지를 소비하는 건 굴을 파느라 녹초가 되어가는 일과 마찬가지다.
에잇 어차피 마신 물, 도로 뱉어낼 수도 없는 거 그냥 깨끗한 물이라고 믿자. 믿음의 대표적 예가 일체유심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 그런 말들이 믿음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내가 지금 이 일을 잘하고 있다는 믿음,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는 믿음, 그런 소소한 믿음들이 내게 밝은 안색을 주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게 사실이라서 믿는 게 아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산타든 괴물이든 무언가를 백퍼센트 믿는 아이들처럼 내 믿음도 순도가 더 높아지길 바란다.
산타 안 믿고 똑똑해지거나 산타 믿고 행복해지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그냥 믿고 오늘 하루 설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