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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14. 2015

경청, 편견 없는

내 마음의 하얀 도화지 한 장 내어주는 일




#7. 경청, 편견 없는
: 내 마음의 하얀 도화지 한 장 내어주는 일




경청이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의 도화지 한 장 내어주는 일. 정갈하고 순수한 하얀 도화지 한 장 그의 손에 쥐어주는 일. 편견이 없어 하얗게 고울 수 있는 도화지 같은 겸손이 하는 일. 


경청의 사전적 의미는 ‘귀를 기울여 들음’이다. 사전은 언제나 2% 부족해서 귀를 기울여 들어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진정한 경청은 귀 기울여 '편견 없이' 듣는 것이다.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도화지의 바탕이 하얗고 깨끗해야 하듯,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편견 없이 하얘야 한다. 편견 없이 듣고 나서 그 후에 비판을 하는 건 좋지만, 이미 자신의 잣대와 틀을 부여잡은 채 상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던지는 비판은 비겁하다. 상대가 빨강, 노랑, 파랑물감을 써가며 형형색색 그림을 그리도록 가만히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는 겸손이 '듣는 일'이다. 


사기 이사열전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청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내가 듣기 싫은 말이 들려오면 마음의 셔터를 내려 버리는 것은 제대로 들어주는 게 아니다. 이미 완성된 내 그림으로 가득 찬 도화지를 상대에게 내놓으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비록 상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반대되더라도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는 태산의 자세로 듣는 일은 어렵지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런 이의 마음은 명화로 가득한 미술관처럼 귀한 그림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진 그런 뒤죽박죽 삼류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명작들이 각각의 품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축적돼 있다. 들어 얻은 재산은 곧 말할 때의 밑천이다. 나는 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이의 글을 3~4장 정도 읽는다. 바로 글을 시작할 때보다 글에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서다. 자칫 딱딱하게 쓰여질 수 있었던 나의 문체는 다른 이의 글을 읽음으로써 감성적인 문체로 보완되기도 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일과를 소개할 때 '읽고 쓴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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