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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14. 2015

여백의 미학

절제가 에너지다




#8. 여백의 미학
: 절제가 에너지다



시詩의 힘은 여백에서 나온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확보한 여백. 이 여백 안에서 독자들은 자기만의 꿈을 꾸고 자기만의 그리움에 사무친다. 작가의 말을 에워싼 텅 빈 여백을 읽는 일은 그 곳에 비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화자의 말이 청자의 우주 안에서 확장하는 순간이다. 생각할 여지를 주는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듯, 청중이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말의 절제가 의미의 풍성함을 낳는 아이러니. 별의 바탕이 어둠이듯 말의 바탕은 말 없음이다.  


욕심 많은 사람은 힘 있는 스피치를 할 수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이야기할수록 스피치는 힘이 없어진다. 100 문장을 쓰고 99 문장을 지우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말도 그렇다. 100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참고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힘 있는 스피치다. 청중에게 여백의 공간을 주고 그 안에서 당신이 던진 말을 이리저리 공처럼 굴려보고 만져보고 껴안아보게 해야 한다. 당신의 말은 마음껏 뛰놀며 키와 몸집을 키울 여백을 필요로 한다.  


몇 해전 영화 <변호인>이 한창 상영 중이었을 때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스피치 했다. 첫 번째 발표자. “오늘 영화 <변호인>을 봤습니다. 벌써 1000만을 돌파했다고 하네요. 영화 속 부림사건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80년대 시대상을 간접적이나마 본 것도 좋았습니다. 실제로 세무, 부동산 전문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다고 하는데 감동적이더군요. 영화 마지막이 무언가 찝찝하게 끝난 감은 있지만 역사와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였습니다.” 이 발표자는 생각나는 것을 모조리 말했다. 정보량은 많지만, 울림이 없다. 


두 번째 발표자. “오늘 영화 <변호인>을 봤습니다. 대사 하나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지만 바위는 죽은 거고 계란은 살아있는 거다. 계란은 언젠가 바위를 뛰어넘을 것이다. 난 절대 포기 안 한다’라는 대사입니다. 이 대사를 듣고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는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계란은 살아있으니 더 나은 것이라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주인공을 보며 ‘계란이 바위와 부딪히는 게 말이 되느냐’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제가 부끄러워지더군요. 저도 이제는 어떤 바위를 만나도 계란처럼 제 생명력을 다해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려합니다.” 이 발표자의 '바위와 계란' 이야기는 여백이 있고 그래서 울림도 있다. 


너무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 것. 욕심 날수록 절제할 것. 청중이 당신의 말을 꾸역꾸역 삼키다 못해 결국 뱉어버리는 일을 만들지 말 것. 하나의 글에 하나의 주제, 이건 글이나 말이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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