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9. 개인_ 선배 말고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법을 잊어간다.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할 때 상대의 이름만으로 저장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이름 앞에는 그가 속한 회사명을 적고 이름 뒤에는 그가 그곳에서 맡고 있는 직책을 적는다. 안어른 컴퍼니 손화신 대리. 이렇게 길고 꽉 차게 적어야 안심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이름만 적어서는 그 사람을 기억할 자신이 없다. 일로 만난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한 사람을 그의 이름 석자 고유명사로써 대하는 게 아니라 역할의 이름으로써 대한다는 게 씁쓸하다. 내가 관계 맺고 대화하는 내 앞의 이 존재는 회사인가, 사람인가.
일을 하면서 가끔 관계자 미팅을 할 때가 있다. 안어른 컴퍼니의 언론홍보팀 직원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일단은 개인적인 소재로 대화의 문을 연다. 이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신지, 댁은 어느 쪽이신지, 출퇴근하기 멀진 않으신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지만 아주 가끔은 개인적인 대화만 하다가 끝나는 미팅도 있다. 물론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그럴 때 그 직원이 안어른 컴퍼니의 대리인이 아니라 이름 석자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왠지 기분 좋은 만남은 늘 이런 식이었다. 만날 땐 비즈니스로 만났지만 이야기하면서 서서히 인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예전에 한 여배우를 인터뷰했을 때 그가 한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화 홍보차 마련된 인터뷰이긴 하지만 어찌 됐건 이 순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비즈니스처럼 임한다면 그건 너무 삭막한 것 같아요."
병원의 간호사이기 전에 그냥 사람이고, 한 가정의 며느리기 전에 그냥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여러 집단 안에서 본인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고 살지만 그 전에 그냥, 사람이다. 그러니 개인을 오직 개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재벌가 회장에게 가족들이 집에서도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 있다. 저건 무슨 콩가루 집안인가 싶었다. 저것은 존중인가, 경멸인가.
엄마를 '엄마'가 아닌 이름 석자로 아주 가끔 불러줄 때가 있다. 사실은 좀 어색하고 낯설지만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든다. 엄마인 것이 너무 당연한 내 앞의 이 여성이,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구나 하는 실감이 확 난다. 그렇게 가끔, 내 나이의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나의 엄마를 하나의 인간 자체로 대우하는 일이 사실 별 거 아니라 이런 일이지 싶었다. 고유명사로 바라봐주기. 지금 순간을 사는 '점' 위의 인간이 아니라, 이어진 생애를 살아가는 '선' 위의 인간으로 바라봐주기.
이념이니 무슨 주의니 하는 것들은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에 폭력이다. 국가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들 모두 다 잔인한 속성을 품고 있다. 히틀러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그 마법은, 엄청난 실체가 있는 무엇이 아니라 개나 줘버릴 이념이었다. 눈 앞에 서 있는, 나와 똑같은 위치에 눈코입이 달린 사람을 '유대인'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 봤다면 그렇게 죽이지 못한다. 인간을 집단이나 역할, 신념의 종속자로 바라볼 때 휴머니즘이 설 자리는 없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산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 최인훈의 <광장> 서문
소설 <광장>에서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은 주인공 이명훈은 진정 휴머니스트였다. 이명훈은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고, 코스모폴리탄(세계인, 범세계주의자)이었다. 하긴, 이런 단어조차도 '-주의'로 끝나는 낱말이라 그에게 붙여서는 안 될 일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어떻게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가 우정이란 걸 공유할 수 있었던가. 그 우정이 어떻게 그리 짠할 수 있었던가. 병장이라는 단어를 떼어버리고 이수혁이라는 이름 석자만을 남겼기 때문에, 어른의 세계에서 아이의 세계로 넘어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 후회로 남아있는 일 하나가 있다. 기자일을 막 시작했을 때 나보다 3개월쯤 먼저 입사한 선배가 있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4살쯤 어렸다. 그 선배가 지하철 역에서 나에게 "나이도 제가 어리고 연차도 별로 차이 안 나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 달라,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 나도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제안했는데, 글쎄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 줄 아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바보 같은!
갓 입사해서 군대 같은 조직문화에 적응하고 있던 난 지나치게 군기가 잡혀있었다. 그때 내 눈에 그 사람은 오직 선배였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사람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었고 그 사람이 좋았다는 점이다. 결말은 말 안 해도 아시리라. 우린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그를 역할로만 보는 바람에.
사람을 잃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