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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Mar 10. 2019

내가 당신을 울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본능




매거진 < 어른, 안 하겠습니다 >




18. 본능_ 내가 당신을 울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의 저 한마디가 예술의 본질을 얼마나 부족함 없이 담고 있는지, 무언가를 창작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 그림 그리는 일을 왜 기술이라고 하지 않고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나는 화가나 음악가 같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글을 창작하는 동안 '어린아이처럼' 쓰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져감을 느낀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이 말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그런 때가 있었다. 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문장을 쌓아갔다. 그걸 누가 알아봐주고 글 참 잘 쓴다고 칭찬하면 종일 충만한 기분에 젖었다. 나의 재능과 노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지금은 욕심이 커질 대로 커져버려서 더 이상 글 잘 쓴다는 소리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재수 없게 들릴 것을 감수하고서 하는 고백이다. 이제는 글쓰기 기술과 능력으로 사랑받기보단 그냥 내가 사랑받고 싶다. '글'과 함께 '글쓴이'로서도 사랑받고 싶어진 것 같다.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커진 게 아니라 반대로 욕심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에 내가 더 많이 담기게 쓰는 것. 글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것. 남들의 시선과 뒤섞인 무언가가 아니라 단지 내 눈으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아내는 것. 


예전에는 글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이제 글이란 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나란 사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처럼 여겨진다. 만약 내게 작곡 능력이 있었다면 글 대신 노래를 만들었을 거고 그림에 소질을 타고났다면 그림으로 나를 표현했을 거다. 꼭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람들에게서 "글 좋네"로 끝나는 평가가 아니라 "이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 "이 글을 쓴 사람이 좋아", "이 사람의 다른 글도 보고 싶어"란 말을 듣고 싶다.


글 속에 나를 최대한 수수하게 담아내는 것. 화장을 지우고 아이처럼 되는 것. 요즘 원하는 건 이런 거다. 솔직하고 본능적으로, 자의식도 뽐냄도 없이 느끼고 생각한 걸 표현하는 어린이를 닮고 싶다. 내 글이 어떤 쓸모를 가질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너무 고민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이 어떤 비난을 받지는 않을지 걱정하기보다는 이 글이 너무 전형적이거나 관습적인 끈에 얽매여있지 않는지를 염려하고 싶다. 검열 없이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의식의 표면에 떠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 아래의 것들로 쓰는 것, 이것이 어린이의 창작방식이다. 어떤 그림의 예술성을 평가할 때 그것이 일정한 공식에 들어맞는가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존의 표현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얼마나 자신만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린 것인가가 기준이 될 것이다. 영혼의 세계, 태초의 세계가 엿보이는 작품.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이성과 논리의 세계 너머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어린이 같은 순수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음악 관련 취재일을 하면서 노래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다. 그들이 하는 말들 중 공통된 게 있는데, 오래 걸려서 만든 곡보다 오히려 짧은 시간 동안 뚝딱 쓰여진 곡이 더 만족스러웠다는 이야기다. 놀면서 재밌게 만든 곡이 더 반응이 좋았단 말도 자주 들었다. 아이들에게 서동요급 떼창 신드롬을 일으킨 아이콘의 노래 '사랑을 했다'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터뷰 때 멤버 비아이는 "그 노래를 만들 때 저는 굉장히 재밌게 놀면서 작업했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는데 그 말이 마치 창작의 열쇠처럼 다가왔다.


"언제나 젊고 거칠고 자유롭고 싶다. 이번 앨범으로 뉴 키즈 시리즈를 마무리하게 됐는데, 앨범명 '뉴 키즈'에서 중요한 단어는 '키즈'다. 언제나 저희는 아이들이고 싶다."


- 아이콘 멤버 비아이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춘다는 건 무언가를 '움켜쥐는' 일이다. 머리로 짜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감정이나 영감을 거칠게 낚아채서 순간에 꽉 움켜쥐는 행위다. 그런 작품들에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거칠게 쓰려고 하면서부터는 손발 오그라드는 글을 잘 쓰지 않게 됐다. 예전에는 미문을 쓰고 나서 '이거 좀 멋진데' 하며 스스로 감탄하곤 했다.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을 곧장 따라가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손발 펴지는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정교한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좀 거칠고 투박한 것이 좋아졌다. 자리에 앉아서 다이아몬드를 섬세하게 세공하는 일보다 짠내 나는 땀을 흘려가면서 다이아몬드를 캐는 일이 더 재미있어졌다.


나는 누군가를 울리고 싶다. 이게 내가 글을 쓰려는 이유다. 아이처럼 쓴다면 그런 짠한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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