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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퇴고’에 중독됐을 때의 해독법

by 손화신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출처_ 픽사베이



"작가님, 이제 그만 손절하셔야 합니다."


"대표님, 조금만 더 고치면 확신하건대 글이 확 좋아질 듯합니다. 부디 제게 일주일만 더 허락하소서."


굽신굽신. 약속한 2차 원고수정 마감일이 도래하자 나는 또 한 번 논리적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설득이라 쓰고 핑계라고 읽는 그것은, 이제 바닥이 났다. 제가 이번 달에 이사를 하는데 조명부터 문고리까지 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느라고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어가지고요 대표님... 그뿐이게요? 회사 일이 또 요즘 워낙... 이렇게 시작된 설득은 점점 레퍼토리를 바꿔갔다. 그리고, 마지막 설득의 근거야 말로 내가 마감일을 계속 구걸하는 본질적 이유란 걸 알게 되었다.


퇴고라는 중독.


그건 인테리어 이슈로 인한 바쁨의 문제도 아니었고, 게을러터진 나의 못남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난 원고수정에 중독돼 버린 거였다. 고칠수록 더 고치고 싶어지는 중독의 미로. 어제 원고 수정을 하고 오늘 다시 읽으며 나는 고개를 45도가량 왼쪽으로 기울인다. 뭔가 어색해... 이거 아니야... 이것은 완성형의 글이 아닌 것이야... 재수정 고고! 그렇게 수정을 하고 5시간 후에 오타만 확일할 요량으로 다시 읽으면 또 고개가 땅을 향해 슬 기울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천한 나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출판사 대표님의 풍성한 경험에서 나온 한 마디를 이메일로 받고서는 나의 이 중독증의 발발 지점을 알게 된 것이다. '에세이의 수정단계에서 반복의 의미와 중독 위험성'이라는 논문이 있다면 거기 적혀있을 듯한 그 원인이란 건, 다음과 같은 대표님의 답장 속에 있었다.


"에세이 같은 경우는 특히 문장의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에 고쳐도 고쳐도 또 고치고 싶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어느 순간 과감히 손절해야 하지요- 최선을 다하셨으니, 괜찮을 거예요- :)"


문장의 가능성! 무한! 과감히! 손절! 괜찮!


특정한 단어들이 매직아이처럼 튀어올랐다. 그래, 이거였구나! 담배 중독의 원인이 니코틴이라면 에세이 무한퇴고의 원인은 문장의 무한한 가능성이었던 거다. 퇴고를 하면 할수록 글이 더 좋아진다는 전설을 아직도 난 실화(?)라고 믿고는 있다만... 그럼에도, 뭐든 정도껏 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바로 이것이었다. 금연을 꿈꾸는 꿈나무들에게 금연패치가 동아줄이듯 적정 퇴고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동아줄임을! 그것은...


마. 감. 일.


그 중독의 종착역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란 질문에 그럼, 이제 답이 나왔다. "이 정도 문장이면 됐어!" 하는 완성도가 아니라, 마감일이라는 '시간'이었던 거다. 6월 30일 자정까지 수정하고 손절할 것! 그리하여 난 가까스로 내 눈을 퀭하게 만든 중독의 꿀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수정도 하다 보니 꿀처럼 달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마감일, 그것은 영어로는 '데드라인' 그러나 의역하면 '생명선'.


온도, 습도, 풍량, 강수량...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린 단위로써 수치화하여 눈에 보이게끔 만든다. 이처럼 원고수정의 척도 역시 기온이나 습기처럼 눈에 안 보이는 것이기에, 시간이라는 보이는 선을 그어 달리는 두 다리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마감일을 너무 적군놈들 대하듯 대하지 않기로 했다. 키보드 위에서 덜덜 떠는 내 손을 붙잡아 멈추게 하는 건 시간이라는 유한재니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고

시간은 유한하고 문장은 무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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