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제목이 좀 센가... 구경 중에 가장 재미나다는 싸움구경을 기대하고 들어오신 독자님이 계시다면 먼저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제목으로 낚으려는 의도는 (20%밖에) 없었음을 알아주시기를. 오늘 쓸 글은 나한테 감정 있는 누군가에 대한 글은 아니고, '글쓰기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내게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하고 유익한 강박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아는 단어 사전 찾아보기다. 어떤 단어의 느낌적인 느낌의 의미가 아닌 '사전적 의미'를 알아야지 백프로 안 것 같은 요상한 활자 계통의 강박이다.
* 공감(共感):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요 근래에 내가 검색한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대체 공감이 무엇이기에 어딜 가나 공감 공감, 여기 가도 공감, 저기 가도 공감 공감하는 건가 싶어서. 일단 내가 가는 여기, 저기, 어디는 그러니까 인터뷰 현장이다. 나는 음악담당 취재기자일을 하고 있는데 주로 가수들의 쇼케이스나 인터뷰를 취재하여 글로 쓴다.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만약 100명의 가수와 인터뷰를 했다고 가정했을 때 99명의 가수가 '공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에서 신기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또한 이들은 '대중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두 단어는 일종의 동의어 같은 거였다.
가수들이 우르르 대치동 같은 데 가서 인터뷰 수업이라도 받은 건가? 의아해질 정도로 엇비슷한 고민과 엇비슷한 목표를 말했다. '음악을 만들 때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어디에 더 비중을 둘지' 고민했고, '대중이 제 노래를 듣고 공감하셨으면 좋겠다'는 최종목표를 갖고 있었던 거다.
"저는 제가 대중가수라고 생각하는데 대중가수는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듣는다거나 순위가 높은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하이 인터뷰 중, 2019. 5. 31
"대중성이란 건 말하는 것, 대화하는 것과 되게 비슷한 거 같다. 어느 정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듣게 표현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대중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윤하 인터뷰 중, 2019. 7. 2
브런치 작가라고 불리는 나는, 내가 정말 작가라면, 나는 '대중작가'라고 생각한다. 등단을 해서 문단이란 테두리 안에서 글을 쓰는 소설가도 시인도 아니니까. 많은 사람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위에서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난, 스스로가 대중적인 글을 쓰든 말든 그것과 상관없이 대중작가 영역 안에 이미 속해있었단 걸 최근에 자각했다. 이런 자의식을 너무 늦게 가진 바람에 나는 글을 쓸 때 '독자의 공감'이란 요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글을 써왔던 것 같다.
'누가 보라고' 쓰는 글이라면 그 누군가와 감정 혹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이런 구체적인 욕심이 최근에서야 들기 시작했고, 어떻게 더 많은 사람과 글 안에서 뭔가를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되게 그럴싸하고 유익한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하다.
공감 가는 글을 쓰고 싶어서
나는 글감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찢어버렸다.
감히 수백 년간 예찬의 대상이었던 '메모'에 반기를 드는 발언을 질러보겠다. 무언가 글의 소재가 떠올라서 메모를 한다는 건 지금 바로 쓰지는 않겠다는 제스처다. '나중에' 쓰기 위해, 빌어먹을 망각에 저항하여 기록해 놓는 행위가 메모다. 자, 이틀이 지나서 드디어 무언가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메모장을 열었다. 거기 적힌 글감으로 글을 쓴다. 이틀 전, 내 머리와 마음을 강렬하게 휘저었던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 이틀 전엔 데일만큼 뜨거웠는데 지금은 미적지근해져버렸다. 이유랄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라는 바람이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불었고 내 감정의 온도는 그날 이후 서서히 내려가버렸으니까. 시간이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감정이란 세상에 없으니까.
공감 중에 제일은 '감정의 공명'이라고 생각한다. 의견이나 주장에 대한 공감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경험상 나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했을 때 가장 큰 힘과 위로를 얻었다. 나도 슬프고 나도 외롭고 나도 뿌듯하고 나도 홀가분하고 나도 갑갑하고 나도 무서워. 너처럼. 그렇게 같은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그러나 제대로 이루기는 매우 힘든 '소통'이라는 걸 이뤄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어제의 메모를 찢고 단지 오늘의 감정이 배인 글감을 붙잡으려 한다. 막 잡아 올린 횟감 같은 싱싱한 감정이 내 글 안에 살아있으면 좋겠다. 아직 바람에 식지 않은 뜨거운 요리가 당신의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글에 지금 감정 있니?
요즘 난 '지금의 내 감정'을 살피며 글을 쓴다. 직전의 글 <'무반응' 속에서 계속 쓴다는 건>도 그렇게 써본 글이다. 외로움이란 그때의 감정을 토대로. 실은 '작가의 서랍' 안에 이 매거진을 위한 글감을 25개 정도 담아놓았고 이 중 하나를 골라서 쓰려고 했는데, 그런데, 내게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걸 안 것이다. 곧장 서랍을 나와버렸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내 손가락은 반사적으로 통계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실망했다.
그때였다. 지금 이 순간, 실망감에서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감정선이 내 안에 드리우는 걸 느꼈다. 그러면 그냥 이것에 대해 써보자 싶었다. 고독감을 최대한 살려서. 배우가 된 것처럼.
앞으로는 감정을 저장해놓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원래 감정이 죽 끓듯 변하는 존재니까. 가벼울 대로 가벼워져서 날아가버린 어제의 감정을 붙잡아 미뤄둔 일기 쓰듯이 쓰는 글은, 이제 쓰지 않기로 했다. 내 감정을 이성이라는 절구 방망이로 내리찍지 않기로 했다. 납작한 떡이 돼 버린 내 감정을 더는 모른 척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