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화신 Jul 17. 2019

나의 집필실은 동네 스벅입니다




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출처_ Unsplash



"당신은 정말 작가 같아요."


'정말' 작가 같은 건 대체 무어냐고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다 할 일관성이 없는 기준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집필실이 있느냐 없느냐.


허세로 넘실대는 내 눈에는 집필실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어쩐지 되게 '직업 작가'처럼 보여서, 그게 그렇게 부러워서, 그렇게 멋있어서, 나도 집필실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글이 안 써질 때마다 분명 집필실이 없는 탓이라고 확신하면서). 노트북만 있으면 스카이다이빙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대에 집필실이 왜 필요하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집필실로 '가는' 행위가 글쓰기의 시작이니까요.


"제 서재는 저한테 신비의 동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서재로 가기 위해 시골길을 따라 걷고 있으면 인생의 다른 것들, 예를 들면 청구서나 쇼핑 목록, 휴가 계획 같은 그 모든 것들은 잊게 돼요. 제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죠. 서재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그 순간, 마음은 ‘아, 이곳은 내가 생각하고, 글을 쓰는 곳이지’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저한테 매우 소중하지요.


전쟁터나 카페 같은 곳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기자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저도 그렇게 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 오기 전에 공항 라운지와 호텔 방에서도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제 최고의 작품은 그런 곳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최고의 작품은 오로지 제가 정한 공간에서 나오죠. 그래서 제 오두막은 아주 소중합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소설가 팀 보울러의 서재' 발췌


팀 보울러 님의 지원사격 덕에 집필실을 꿈꾸는 나의 바람은 딱히 허세가 아닌 것으로 정리된 듯하다. 허세기 없는 내 눈으로 다시 봤을 때, 예술하는 사람들이 작업실로 가는 건 여전히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잘 써질지 안 써질지도 모를, 읽어줄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글을 쓰겠답시고 어마무시한 부동산 비용을 지불하며(그것이 월세든, 전세든, 자가든 셋 다 오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집필공간을 마련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내겐 집필실이 있다. 제목으로 말해버려 절반의 '뻥'이란 걸 눈치채셨겠지만, 그곳은 바로바로 우리동네 스타벅스다(물론 월세/전세/자가 아니고 그냥 손님 자격이다). 한 달 전쯤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으니까 '우리동네였던' 스타벅스가 정확한 말이겠지만, 요즘도 계속 옛 동네 스벅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으니 우리 동네라고 부르겠다. 


나는 내 두 번째 책 <어른 안 하겠습니다>의 시작과 끝을, 원고 구상부터 원고 탈고까지 그 모든 과정을 내 집필실인 동네 스벅과 함께 했다. 딱히 스벅을 찬양하려는 의도는 없고, 다만 청구서나 쇼핑 목록에서 꽤 떨어져 나왔다는 인상을 줄 만큼 적당히 가까운 듯 먼 듯한 위치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앉아 노트북을 (충전까지 해가며) 타닥거려도 눈치 주지 않을 '사장님' 아닌 '직원'이 근무하는 커피집이면서, 와이파이가 잘 잡히고 에어컨 혹은 난방기의 온도가 적당하여 뇌를 포함한 나의 신체가 쾌적할 수 있으며, 직원들이 친절하고 밝은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서 심지어 커피까지 맛있는 그런 곳이 스타벅스여서 그렇게 정한 것뿐이다.


Coffee is about Exploration.


한쪽 벽면에 이런 글씨가 입체적으로 매달려 있는 나의 집필실에서, 나는 정말로 나와 그리고 이 세상을 탐험하고 또 탐험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정한 나의 집필실은 내 안을 탐험하기에도, 대중 속을 탐험하기에도 딱이었다. 왜냐하면 카페라는 공간은 어디나 그렇든 가장 외로우면서, 가장 외롭지 않은 모순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늘 앉던 내 자리에 앉으면 딱 그 테이블만큼의 동그란 공간이 나만의 세계다. 1미터 옆에 타인이 붙어 있지만 우린 서로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다. 각자가 유령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럴 때 나는 참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윗 소로우처럼 스윗한 외로움이자 '적당한' 외로움이다. 집에서 혼자 있을 때보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외딴섬처럼 존재할 때 외로움은 더 구체적이고 진해지지만, 어쨌든 사람들 속에 있다는 사실이 외로움을 지워주기도 하니까. 썼다 지웠다 망설이는 편지의 글자들처럼, 그렇게 나의 외로움은 커졌다 작아졌다 그곳에서 망설인다. 


글을 쓰는 행위는 온전히 혼자 하는 일이기에 온통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가장 외로우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아야지 글이 잘 써진다는 거다. 내 경우는 그렇다. 나는 철저히 혼자지만,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하는 걸 느끼게 해주는 곳에서 글이 가장 집중도 있게 써진다. 전업작가들이 집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다른 작가들과 함께 글을 쓰는 공동 집필실을 마련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지 싶다. 집필실로 '이동하는' 의식을 통해 일상적 삶과 분리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그러한 이유 말고도.


그리고 이건 꽤나 괴상하면서도 앙증맞은 나만의 이유인데, 그곳 직원들과의 우정 때문에 스벅을 집필실로 정한 거다. 음... 내적 우정이랄까? 그것은 마치 외사랑처럼 나 혼자 쌓아간 우정이다. 사실 나는 내 테이블 옆에 앉은 매일 얼굴이 바뀌는 낯선 사람들이 아닌 안면을 쌓아갈 수 있는 스벅 직원들을 통해 '외롭지 않음'을 느낀다. 그들은 나의 다정한 친구들이다. 물론 그들은 참새 눈곱만큼의 관심도 내게 보이지 않지만 나는 글을 쓰다가 잘 안 풀리거나 지겨워지면 고개를 들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곤 한다. '오늘 잭(가명)은 오후 근무인가 보네'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브런치에 안어른 에세이 첫 글을 올린 작년 12월부터 최종 마무리 작업 중인 지금까지 8개월 동안 거의 매일 그 집필실로 향했으니, 그들도 이만하면 나를 알지 않을까? 얼굴은 알 거야.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들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하던 내 곁을 지켜준 소중한 나의 친구들이고, 난 이 우정을 지켜갈 것이다. 고맙습니다, 집필실 친구들.   


타인과 느슨하게 연결된 외롭고 즐거운 나의 섬.


그곳 카페에서 내가 보낸 8개월은 기쁨 그 자체였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나혼자)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서,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써나갈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기 때문에 그 탐험을 결코 멈추고 싶지가 않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작가님의 집필실은 어디인가요? 곧 출간될 나의 안어른 에세이에선 아마도 내가 사랑한 그곳의 커피향이 진하게 날릴 거예요.




작가의 이전글 내 글에 지금 감정 있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