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쓸수록 나는 내가 됐다 >
햇살 좋은 어느 날은 나도 사업이란 것을 해보면 어떨까 하여, 왠지 나만큼은 절대로 안 망할 것 같은 누구나 사로잡힌다는 그 뻔하디 뻔한 거짓 예감에 젖은 채로 아이템을 고민했다. 고민만 하고, 깨끗이 접었다. 내게는 어떠한 밑천도 없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다. 기본자금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건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르거나, 세상 물정을 완전히 잘 아는 두 부류의 사람에게만 쉬운 일이었다.
글 쓰는 일을 생각하면 나는 그래서 놀라고 또 놀란다. 그 이유는 글을 쓰는 게 밑천 없이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익을 내기 위해서 하는 사업을 비유로 들었으니, 글로써도 수익을 내는 그림을 만들어야지 등식이 성립되는 걸 안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불행히도, 더 잘 아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 전혀 돈이 안 드는 글쓰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인 일이다. 노트북만 있으면 된다. 아, 노트북도 사려면 돈이구나. 그렇다면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 참, 종이랑 펜 사는 것도 돈이 드는구나. 그래도 종이는 안 사도 되지 않을까?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주인공이 자기 티셔츠를 벗어서 거기다 글을 막 쓰지 않겠는가(멋있었다)! 아차, 그렇다 해도 모나미 볼펜 하나 살 돈은 필요하겠구나. 그렇다면 별 수 없다. 휴대폰 메모장에다가 쓰는 것으로 정리하자. 솔직히 집은 없어도 휴대폰은 다 갖고 있지 않나.
글 쓰는 일은 연장이 없어도 되고, 사무실이 없어도 되고, 도와줄 직원이 없어도 되고, 차도 없어도 되고, 재료도 없어도 되고, 격한 신체 노동이 없어도 된다. 정부나 기관의 허가도 없어도 된다. 다만 필요한 게 있다면 커피 한 잔? 그리고 시간. 글감마저도 없어도 되는 것은, 마감시간만 있으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쓰게 되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써도 글은 글이다.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월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놀란다. 내가 글을 써서 돈을 벌었다는 게 매달 신기하다. 글 쓰는 건 (아직까지는) 내게 재미나는 일인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누군가에겐 되게 얄미워 보일 것 같은 강렬한 직감이 든다. 하지만 당신, 안심하셔도 좋다. 내게도 회사란 수시로 XX비용이 드는 고된 곳인 건 마찬가지니까. 다만, 글을 썼는데 밥이 나온다는 것 자체에 대한 경외심이 기본에 깔려있다는 얘기다.
노트북 하나로 나는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노트북을 열 때나 노트북을 닫을 때마다 (자꾸 놀라서 미안한데) 또 한 번 새롭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노트북 하나로 글을, 내 세계를, 기사를, 브런치란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게 봐도 봐도 마술이다. 이건 돈이 하나도 안 드는 개인사업이지 않은가. 몸과 입을 놀리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내 노트북은 게다가 회사 노트북이다. 나는 개인 노트북이 없다(이걸로 기사보다 브런치 글을 더 많이 쓰는 건 회사에 죄송하게 생각하는 바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같은 걸 느낀다. 브라운관과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저 진짜 같이 화려한 세상이 어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세상이라는 사실이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극본을 쓴 작가가 단지 한 잔의 커피를 책상에 올려두고 저런 있을 법한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걸 생각하면, 우산 없이도 폭우 속에서 옷 하나 안 젖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수익이 나는 족족 모두 순수익이다. 빼야 할 비용이 거의 없다. 잘 나가는 작가들은 손가락 근력을 이용해 회당 몇 억을 번다. 물론 원형 탈모가 올 만큼 스트레스는 받겠지만. 그것도 비용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부러운 그들의 재능이란!
작가가 아닌 다른 여러 직업군도 책상에 앉아 지적 노동으로 돈을 번다는 걸 안다. 또한 물론, 너무나도 물론, 글로 밥벌이를 하려면 글 쓰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 능력과 감성은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나는 지적자본이란 게 예전부터 그렇게 멋져 보였다. 밑천이란 게 꼭 돈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내 머릿속에 있는 지적인 무언가가 자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창조적인 일로써 수익을 낸다는 게 얼마나 근사하게 보이던지.
내 주변 사람들은 지겹게 들어서 알 것이다. 먹고사는 것에 관한 나의 꿈 말이다.
저작권으로 먹고 살아봤으면...
내 눈에는 지적재산이 세상에서 제일 폼나는 재산이고, 저작권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권리로 보인다. 작사가 김이나처럼 저작권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볼 때면 가장 개성 있는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단 생각에 부러워 죽는다. 저 자막처럼 나도 같이... 저작권으로 먹고살고 싶다. 감성을 폭신하게 녹여줄 깊은 밤과, 편안한 의자와, 작은 조명등과, 사랑했던 지난 연인에 대한 추억만 있다면 그것이 가사가 되고, 또한 노래를 듣는 수많은 사람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위로와 힘이 된다는 건 무척 복받은 일처럼 보인다. 물론 그 지적 결과물은 리스너의 마음속뿐 아니라 창작자의 통장 속에서도 어여쁘게 쌓여갈 것이다.
글을 놓고 돈 이야기를 하다니 이거 되게 속물적인 글 같다. 하지만 내 의도는 반대편에 놓여있음을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펜 하나만 있으면 사람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진심을 책 또는 그밖의 저작물로 형체화할 수 있다는 게, 펜 하나만 있으면 해리포터나 호빗이 사는 판타지 세계를 구축해낼 수 있다는 게, 펜 하나만 있으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너무 경이로워서, 내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그래서 오늘은 간지럽지만 글쓰기를 예찬하는 열렬한 고백의 편지를 써보았다. 백만 달러보다 진실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