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를 출간하고, 지금의 나
에세이 쓰기는 어떻게 보면 참 쑥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무엇에 관해 쓰든 끝내 나에 대해 쓰게 되는데, 이걸 읽으면서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쏘 왓??'
그럼에도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타인과 마음을 나누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사는 게 진짜 '사는 일'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내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나는 내 이야기하는 걸 꽤 싫어하는 사람이다. 친구들을 만나도 애들 사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지, 내가 어떻게 살고 그 안에서 어떤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있는지 잘 털어놓지 않는다. 상대에 따라 가끔은 안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튼, 안 물어보는데 먼저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게 왠지 어색해서, 그냥 그래서.
그러다 몇 개월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안 사실인데,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려면 '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단다. 난 좀 당황스러웠다. 상대에 관해 궁금해해주고 그 사람이 신나서 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질문을 던져주고 들어주는 게 마음을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좀 많이 충격이었다.
세상에 다가가기 위해 나를 열어 보여주기.
내가 관계 맺고 사는 세상. 이 세상 안의 타인을 더 사랑하기 위해,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나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나는 당최 알 수 없었다. 그 방법을 몰라서 싸이월드에 공개적으로 일기도 썼고, 카카오톡 프로필에 수십 장의 내 사진을 올렸고, 블로그를 만들어서 내가 쓴 기사 중 공들인 것들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가장 최근은 브런치였다. 여기에다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세상을 써 내려갔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동안에 어딘가에서 많은 가수들이 노래를 만들었고, 그것을 대중에게 들려주었으며, 많은 댄서들이 안무를 만들었고, 그것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도자기가 만들어졌고, 독창적인 디자인의 물건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다양한 책들이 생겨났다.
나는 글이 '내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이 세상에 내 이야기를 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 그래서 브런치에 쓴 글들을 모으고, 그것의 몇 배의 글을 더 써서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멋진 스피치였고, 가장 친절하고 다정하게 타인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내 이야기가 잔뜩 들어간 에세이를 '종이'에 '인쇄'하는 전통적이고 시대를 넘어 여전히 제일 폼나는 일을 했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나는 이제 타인과, 나를 둘러싼 세상과 좀 더 가까워졌고 친해졌다. 나를 먼저 보여줬으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한 것이다. 그에 따르는 타인의 피드백을 확인하면서 난 이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려 한다. 인터넷에 적힌 책 리뷰라든지 주변인의 카톡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네 이야기를 읽고, 네가 나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어'라는, 교감. 내가 아닌 타인과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주고받을 때, 그것이 어딘가 조금씩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관계이고, 소통이다.
https://brunch.co.kr/@brunch/184
던져진 내 말을 들어준 타인이, 그들도 그들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출간이라는 것이 '근사한 삶의 방식'인 이유다. 신간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를 만들어준 웨일북의 권미경 대표님이 쓴 인터뷰를 어제 보았다. 이런 인터뷰를 하셨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이걸 읽고서 나는 나 자신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권미경 대표님에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란 사람을 이렇게 깊숙이 알아주는, 심지어 나도 모르는 나까지 말해줄 수 있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다.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과 내 인생, 나를 둘러싼 가까운 사람들, 그 사이사이의 섬들에서 사랑이 마구마구 피어나는 충만함, 대략 그런 느낌이다.
지난주에 나는 책 판매량이 저조하다고 초조해했지만, 권미경 대표님과 김건태 에디터님이 오해는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더군다나 이미 원하는 것을 다 얻었기 때문이다. 내 주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책을 한 문장 한 문장 소중하게 읽어주고 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쓰고, 출판사 식구들과 함께 만드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완벽한 선물이었다. 지난주에 내가 초조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상하게 이번주부터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앞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는 꼭 읽을 그 사람들이 읽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분명, 출간된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것이다. 바다 위에 띄운 유리병 편지처럼 흘러서 흘러서 어느 해변가에 닿을 것이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읽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속적으로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눈맞춤을 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셈이다. 심지어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출간된 책은 내가 쓴 것이긴 하지만 '내 것'이라는 개념은 이제 희미해졌다.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책의 의미와 책의 가치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100명이 읽으면 100권의 다른 책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타인의 것이고, 세상의 것이니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들어보고 그렇게 소통하는 것, 이게 신나는 나의 다음 일이다.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런 것들에 웃었고, 저런 것들에 위로받았어요. 당신도 그랬나요? 아니면, 당신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것들에 웃고, 어떤 것들에 위로받았나요? 저는 이런 태도로 이 세상을, 내 인생을 살아나갈 거예요. 당신도 그런가요? 아니면, 당신은 어떤 태도로 당신의 삶을 살아내고 싶나요?"
당신과 내가 주고받는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며 수북하게 쌓일 것이고, 그러면 우리 사이는 그만큼 더 가까워질 것이다. 당신과, 세상과 더 친해졌다고 느낄 때, 나는 내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기분이 된다. 참 근사한 기분이다. 그래서 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