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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Feb 19. 2021

저는 여러 겹으로 이뤄진 크레이프 케이크입니다



저는 여러 겹으로 이뤄진
크레이프 케이크입니다




ⓒ 언스플레쉬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밝기만 한 줄 알지만 조용히 보내는 시간도 많다. 저를 알게 된 사람들은 '헨리한테 이런 면도 있네'라는 이야기를 한다. 밝은 모습, 진지한 모습 다 저라고 생각한다." (매거진 '엘르' 2019년 4월호, 가수 헨리 인터뷰 중)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문득 몇 달 전, 배우 박정민과 나눴던 인터뷰가 오버랩됐다. 자신이 맡은 인물이 되기 위해 어떻게 캐릭터의 성격을 ‘만드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사람 안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공존하잖나. 내 안에 없는 성격을 만들어낸다기보단 내 안에 있는 성격들 중에 맡은 역할에 가장 가까운 하나를 끄집어내어 극대화한다.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나의 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배우 박정민 인터뷰 중)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해보니 이렇게 정리가 됐다.


전부 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세상 모든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는 상충하는 성향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기도 한다. 그러니 ‘저 사람은 성격이 어떻다’라고 말할 때, 그건 그 사람이 가진 수많은 기질 중에 가장 비중이 큰 것을 대표로 말한 셈인 것이다.  


내 안에 이토록 많은 성격들이 섞여 있는데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남들이 알아듣기 쉽게끔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잘 설명하기 위해 나다운 모습을 정해두려고 하기도 했다. 누군가 내게 “넌 어떤 사람이니?” 물으면 “나 이런 사람이에요”하고 머뭇거림 없이 명쾌하게 답할 수 있어야지만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라는 착각에 공식적인 나를 마련해두고자 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이방인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중)


어느 날, 모든 진실들이 한순간에 저절로 깨달아지듯 이 사실 또한 그냥 깨달아졌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설명되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사람인데 왜 나는 자꾸만 어떤 틀 안에 자신을 구겨 넣으려 한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나란 사람의 설명서를 작성해두지 못해 안달이었냐 말이다.  


ⓒ 언스플레쉬


난 내가 카스텔라인 줄 알았다. 옆구리를 떼어먹든 머리를 떼어먹든 한결 같이 균일한 맛의 카스텔라.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여러 겹으로 된 크레이프 케이크였다. 층마다 색깔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겹겹이 누운 그 층들이 하나의 케이크를 만들었고, 모든 층이 나였다. 그러니 가장 바깥으로 보이는 자아만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공식적인 나라고 여길 필요가 애초에 없었던 거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준비해둔 ‘사회적인 자아’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 슬며시 드러나는 ‘심층적인 자아’도 나로 인정하는 일. 지금부터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인 듯하다. 촌스럽게 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겹 한 겹 떼어먹지 말고, 이제라도 대범하게 수직적(?) 포크질을 해야 할 때다.


"저를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 어떤 틀에 저를 가둬두고 싶지 않다. 어떠한 카테고리 안에도 저를 넣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가수 이하이)


가수 이하이를 인터뷰할 때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하이를 아이돌로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데, 자신을 어떻게 불러주면 좋겠느냐고. 이 물음에 그는 위와 같이 답했던 것이다. 자신을 어떤 부류의 가수로 규정하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그의 태도가 근사했다. 남들이 나를 규정하려 하든 말든 니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초연한 마음이었다.


남의 시선에 갇히는 순간 나답게 사는 건 끝이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끝이다.


내가 아이였을 땐 사회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의 구분이 모호했지만 어른이 될수록 그 구분이 점점 또렷해져 갔다. 나는 왜 이 가면을 더 튼튼하게 만들려 애쓰는 걸까.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그저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답하면 그만인 것을, 어른이 된 나는 나에 대해 자신감 있게 브리핑하지 못할까봐 내심 초조해했다.


ⓒ 언스플레쉬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세상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명료하게 알고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내가 누군지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말할 때 오히려 나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내가 정한 규정에 나를 맞춰가려 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직감이 들었다. 나조차도 보지 못했고, 그러므로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내가 저 너머에 또 존재한다는 직감. 나를 규정해놓으면 ‘저 너머의 나’가 소외감을 느낄 거라는 예감도 함께 들었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자신이 하는 일과 기분을 잘 살피고 마음에 조용히 귀 기울여라. 곧 자기 자신의 마음에 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묻는 척하며 자신이 상상한 타인에게 묻지 마라. 자신을 응시하는 척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을 응시하지 마라. 더불어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 짐짓 진정한 자신이라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비트겐슈타인, <철학종교일기> 중)


세상에 공개한 나도 있지만 가족과 친구들만 아는 나도 있고, 가까운 그들조차 모르는 비밀스러운 나만의 나도 있다. 모두 나다. 이제 나는 가면 하나로 얼굴을 가리느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모든 가면이 나다. 멀티 페르소나란 말도 있지 않나.

 

이제 나는 ‘어떤 사람’일 필요가 없어졌고, 그러니 어제의 차분하던 내가 오늘 알 수 없는 깨방정을 떤다 하더라도 그건 나답지 않은 행동이 아니라 또 다른 나다운 행동인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청하를 잘 모르겠어.’ 이 말을 들으면 좋겠다. 매번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싶다.”

(매거진 '에스콰이어' 2019년 7월호, 가수 청하 인터뷰 중)



** 에세이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2019, 웨일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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