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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Aug 31. 2021

사주팔자와 노인과 바다와 이방인






며칠 전에 사주를 보러 갔다. 내 발로 혼자 찾아간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극심하게 뻘쭘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내 운명이란 걸 그날 살짝 들춰보았다. 학생 때 으레 그랬듯 답을 도저히 모르겠다 싶을 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들춰보지 않는가, 맨 뒤의 해설지를. 근래에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니 어떻게 흘러갈지는 차치하고서 어떻게 흘러가도록 원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답답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간 거고, 보고 나니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그렇다고 사주를 다 믿는 건 아니다. 사실 내겐 신앙이 있다는... 어쨌든, 사족은 이만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제 꺼내볼까 한다.


인생은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고 당첨되는 것이 아니고, 접촉사고 같이 골치 아픈 일을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해서 사고가 안 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데 또한 그 타이밍이란 게 내가 원할 때 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타이밍이 왔다 해도 상대방의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다. A가 나를 좋아해 줬으면 싶지만, 결혼 적령기에 나를 좋아해 주는 건 B다. 인류의 대부분이 아마 이렇듯 카뮈의 <이방인> 못지않은 부조리한 생을 살다 갈 거다.


사주 샘이 그러더라. 내 인생에 두 번의 대운이 깃드는데 그중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하나는 적절하지 않은 타이밍에 왔다고. 12살 때. 그때의 넌 아마 김연아처럼 예체능을 하지 않은 이상, 학업을 하느라 자신에게 온 대운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 그랬겠지.


12살의 대운보다 내 관심을 끄는 건 '앞으로 올' 대운이었다. 나는 그것이 사실 2021년 올해 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지난 5월에 낸 신간 <쓸수록 나는 내가 된다>의 대박을 은근히 기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무튼 그 사주가 맞는다면 내 대운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번해에 대운이 올 거라고 매년을 그렇게 참으로 기대하며 참으로 열심히도 살았던 것이다.


인생은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문장을 두 번 썼다는 건 이게 이 글의 주제란 의미일 거다. 하지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인생이 어차피 의도한 대로 안 되는 거면,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운이 와주는 게 아니라면, 그럼 무언가를 꿈꾸고 의도하면서 아등바등 열심히 노력하며 살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출간한 세 책을 예로 들자면, 그 이상의 노력은 불가능할 정도로 최선의 최선을 다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만든다. 천만 관객을 꿈꾸면서 온 에너지와 염원을 다해. 하지만 천만 영화는 극소수의 트로피다. 많은 가수들이 신곡을 발표하자마자 빛 한 번 못 보고 묻혀버리는 참혹함을 겪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년 올해가 내 대운의 시기라고, 올해가 내게 주어진 최고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등바등 무식하고 열심히 살아갈 거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이게 내가 오늘 하려는 말이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주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난 후에도 자꾸 떠오른 <노인과 바다>와 <이방인> 때문인 듯싶다.


노인은 물론 만선을 꿈꿨다. 제발 좀 잡고 싶었다. 크고 튼실한 놈을 포획해서 당당하게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노인은 끝까지 혼신을 다해 고기를 잡으려 애썼다. 그렇게 목숨 걸고 잡은 고기를 결국은 상어 떼에 다 물어뜯겨 뼈만 짊어지고 돌아왔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결과가 아닌 노인의 행위 자체가 중요하니까. <이방인>의 뫼르소도 노인처럼 처참하나 위대한 인물이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간 여행에서 우연히 싸움에 휘말려 우연히 정당방위로 총을 쐈고 우연히 사람을 죽인 그에게 판사는 말한다. "우연? 뻔뻔도 하지!" 그러면서 사형을 선고한다. 이토록 부조리하고 우연한 죽음을 앞둔 뫼르소는 깨닫는다. 인생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 인간은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이 생을 살면서(=의도한 대로 안 되는 이 생을 살면서) (=부조리 투성이의 이 생을 살면서) 지금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절절히 생각한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사형수고, 그러니 매 순간 죽음을 의식하며 온 몸으로 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이 순간의 기적을.


내가 아무리 원해도 때가 와야지만 이룰 수 있고, 때란 것이 안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악에 받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생각한다. 최대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이 뭣 같은 운명과 붙어보자, 우아하게! 그 방법은 하나. 끈질기게 원하는 것들을 소망하면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밀어 올리고 또 밀어 올리는 것이다. 맹목적인 희망을 안고 고기를 잡는 노인처럼 나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그게 이 부조리한 생에 가하는 가장 존엄하고 멋진 저항이 아닐까, 아름다운 복수가 아닐까.


며칠 전에 한 가수를 인터뷰했는데 그가 마침 그러더라. 원하는 것이 원하는 타이밍에 오지는 않는다는 걸 요즘 많이 느낀다고. 그걸 노래로 썼다고. 그 말에 기자가 물었다. 그러면 음악 역시 사랑받을 타이밍이란 게 있지 않느냐고, 그걸 어떻게 맞추려 하느냐고. 이 질문에 그는 그걸 절대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이 그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한다고 대답했다. 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그러나 이 바보 같음은 얼마나 또 위대한지! 이런 복수야 말로 멋지지 않은가. 그럼에도 희망을 붙잡는 우매함.

 

사주가 어떻게 나오든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의 내 생에는 내가 원하는 일도, 원하지 않는 일도 일어날 것이고 나는 뫼르소가 항소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듯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니체처럼 외칠 것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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