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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25. 2015

T.P.O

옷 잘 입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2. T.P.O
: 옷 잘 입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저 사람 옷 참 잘 입어.” 

어떤 사람에게 이 말을 할까. 명품 옷을 입은 사람? 유행하는 옷을 입은 사람?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를 갖춘 사람? 이들 모두에게 옷 잘 입는다고 말할 순 있지만, 이 모든 것을 갖추고도 절대 그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결혼식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는 사람. 장례식장에 빨간 반바지를 입고 오는 사람. 이들에겐 그 옷이 아무리 한정판 명품이라고 해도 옷 잘 입는다고 말하긴 힘들다.  


T.P.O를 지키는 건 패션의 기본이다. T.P.O란 Time(시간) Place(장소) Occasion(경우 또는 상황)의 첫 머리를 딴 약자인데 원래 패션업계에서 쓰는 마케팅 용어다. 의류업체를 예로 들면 T.P.O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하는 다양한 형태의 상품을 개발하여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마케팅 용어를 넘어 때와 장소, 경우에 맞는 차림새 등을 칭하는 말로 넓게 쓰이기도 한다. 


“저 사람 말 참 잘해.”

이런 소리는 그럼 누구에게 하는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말에서도 중요한 게 T.P.O다. 때를 살펴가며, 장소를 가려가며, 상황을 파악해가며 말해야 한다. 물론 T.P.O에 맞게 말한다고 말 잘하는 달변가라고 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말을 아무리 유창하게 해도 T.P.O에 안 맞으면 도루묵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화술의 문제라기보단 센스의 문제다.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아무리 말을 잘해도 눈치가 없으면 '꽝'이란 말이다. 콕 집어 예를 들자면 모임에서 남의 발언시간을 뺏으면서 말하는 사람, 모임 종료시간이 지나는 바람에 모두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데 길게 길게 할 말 다하는 사람. 꼭 필요한 말이면 해야겠지만 청중들이 마음속으로 "아, 언제  끝나!"라고 외치게 만든다면 그건 말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냥 눈치가 없는 거다. 센스가 부족할 때는 아래의 T.P.O가 약이다.  


1. Time(시간): 시기나 시간대를 고려할 것
2. Place(장소): 장소와 만나는 상대를 고려할 것 
3. Occasion(상황): 상황이나 경우, 자신의 역할을 고려할 것


끝으로 연암 박지원이 옛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대목이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수박이야 달고 시원한 것이지만, 겉만 핥고 있는데서야 그 맛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후추를 통째로 삼킬진대 그 맵고 톡 쏘는 맛을 무슨 수로 느낄 수 있겠나? 제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방법을 알아야 한단 말일세. 이와 마찬가지로 제아무리 좋은 것도 적재적소에 놓일 때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이 제아무리 좋기로소니, 한여름에 그것을 빌려 입는다면 따뜻하기는커녕 온몸에 땀띠만 날 것이 아닌가? 옛사람의 글이 제아무리 좋다 해도, 지금 여기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읽는 이에게 공연한 괴로움만 안겨줄 뿐일 걸세.”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中)


한여름에 담비 갖옷 입는 소리하네! 유창하게는 말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런 소리는 안 듣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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