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시대의 지식경영법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정리하는 데서 나온다.
- 루드비그 비트겐슈타인
#13. 암기의 재발견
: 스마트폰 시대의 지식경영법
외우는 전화번호가 점점 줄어간다. 지금 난 내 번호, 부모님 번호 외에는 머릿속에 담아둔 번호가 없는 상태다.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더 외우는 일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외장하드(스마트폰)가 이렇게나 믿음직스럽고 넉넉한데 굳이 내장하드(머릿속)에 힘겹게 지식을 저장할 필요가 없긴 하다.
하지만 어떤 지식은 외워야 한다. 사소한 지식이야 외장하드에 저장하는 게 효율적이지만 사유의 씨앗이 될 만한 핵심 지식들은 내장하드에 담아야만 진정 내 것이 된다. 외움으로써 지식은 지혜로 숙성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외우는 일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많겠지만 무언가를 외우는 일은 무조건 많은 책을 읽거나 많은 지식을 접하는 일보다 창조적인 활동이다. 외워서 머릿속에 자리 잡은 지식은 그 안에 있는 다른 지식들과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시간과 함께 삭으면서 나만의 개성이 묻은 지식, 지혜가 된다.
최고의 지식경영가로 불렸던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 18년 동안 후세를 이끌 수백 권의 책을 써냈다. 수백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정약용이 단순히 지식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식을 효과적으로 정리, 분류, 요약하여 자신의 것으로 재정비한 데 있다. 그는 독서카드와 같은 자신만의 지식정리 시스템을 마련해 간추려낸 핵심을 필요에 따라 외웠다고 한다. 외장하드와 내장하드를 적절하게 활용한 셈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다산이 그랬던 것처럼 방대한 외장하드의 지식을 자신의 가치기준에 맞게 선별하고 그중 일부를 암기하여 내면화해야 한다. 지식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외우려면 일단 메모해야 한다. 다산이 독서카드를 만들었듯, 나만의 메모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종이로 된 수첩이든 메모 애플리케이션이든 상관없다. 메모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보면서 외워야 한다. 메모만 한다고 저절로 내장하드의 지식으로 자리 잡는 것도 아니며 오직 외움으로써 그것이 시간과 함께 숙성되고 삶의 경험과 만나며 나만의 지혜로 무르익는다. 또한 무언가를 외운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을 보고 또 보는 반복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핵심을 발견하는 일이며, 이면의 것까지 바라보는 시각을 기르는 일이다. 무엇이든 처음에 한 번 보고 말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도 반복하고 외우는 과정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정비되고 진화된다.
방송인 김제동은 신문이나 책을 보며 좋은 글귀를 만나면 메모해놓고 외워서 강연이나 방송에서 써 먹는다고 한다. 김제동처럼 순발력이 뛰어나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일지라도 메모하고 외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자유자재로 써 먹을 수 없다. 원고를 미리 준비해서 그걸 보고 읽는 스피치가 아닌 이상, 머릿속에 내장된 지식이 있어야만 바로바로 꺼내서 말로 버무려낼 수 있는 것이다.
암기는 창의성과 반대되는 오래되고 무식한 행위가 아니라, 지식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현시키는 현명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