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절제
재치의 핵심은 간결함이다.
- 셰익스피어
#14. 간결함은 언제나 옳았다
: 삶과 절제
브래드피트 주연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글을 써오도록 시키는데 아들이 열심히 글을 써오면 아버지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선 '반으로 줄여 와'하고 돌려보낸다. 이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2장을 1장으로 줄여오면 1장을 다시 1/2장으로 줄여오게 하고, 1/2장으로 줄여오면 또 다시 한 문장으로 요약해오라며 돌려보낸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한 것일까? 아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글을 요약하게 하며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간결함 속에 핵심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알맹이만 남겼을 때 그것에 담긴 진리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이 앞으로의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버지는 끊임없이 글을 요약하게 하며 가르쳐준 것이다.
간결함은 무작정 '짧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결함은 '추려진 핵심'이다. 그러므로 간결함이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만만한 산이 아니며, 복잡해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간결해지는 일이다. 1998년 5월 비즈니스위크에 실린 스티브잡스의 인터뷰에도 이런 언급이 나온다. "나의 만트라(주문) 중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 생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한번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
유머에서도 간결함은 첫 번째 조건이다. "원래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내가 하면 재미없어진다" 말하는 사람은 간결하지 못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재치의 핵심은 간결함이라고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재치 있는 말은 절대 구구절절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길게 늘어지기 전에 날렵한 화살을 쏘듯 유머를 '날려야' 한다. 너무 길게 생긴 화살은 꼬리가 휘청휘청거려 과녁에 닿기도 전에 방향을 잃고 만다.
유머가 아니더라도 말은 언제나 간결한 것이 좋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말, 간결하면서도 뜨거운 말들로 가득 찬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라 믿고 있다. 말이 간결하다는 것은 무작정 말수를 줄인다는 의미가 아니며, 한 마디의 말을 해도 군더더기 없이 진실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흐르는 강물처럼>의 어린 아들이 그러했듯 핵심을 추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 속에서 상처 주는 말, 진실을 가리는 말, 품위 없는 말들이 걸러지고 알맹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간결한 말은 언제나 옳았다. 또한 간결한 말은 옳고도 따뜻했다. 간결한 말은 상대를 위한 배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간결함은 내 말을 줄이고 당신의 말을 듣겠다는 배려다. 스피치 동호회를 9년 동안 참석하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 따라서 간결함은 본성을 극복하는 일이라는 것.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을 쓴 소설가 김훈의 문장은 짧지만 수려하고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버리는 문장 없이 밀도 있는 언어로 글을 짓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건조하지 않고 뜨거울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짧은 문장에 치열하고 밀도 있은 진리를 담기 위해선 사유의 알맹이만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알맹이만 남기려면 사유의 밑바닥까지 한없이 들어가는 고된 작업을 거쳐야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말도 김훈의 문장처럼 생겼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런 '촌철살인'의 말은 글쓰기가 그러하듯 사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
절제하는 말하기는 절제하는 삶을 모방한다. 말이란 건 내면에서 나오고 내면은 삶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절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절제하는 말하기를 한다. 정갈한 내면에서 간결한 말이 나오며 정갈한 내면은 이미 절제된 삶의 아름다움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