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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Oct 02. 2015

사소함의 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15. 사소함의 힘
: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앉아서 대화를 할 땐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으면서 일어서서 말을 할라치면 이야기 보따리를 꽁꽁 묶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앉아서는 그렇게 사람 마음을 빼앗아 놓고서 막상 멍석이 깔리면 입을 다물고서 쭈뼛거린다. 이런 '멍석 과민증'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너무 떨리거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나. 전자인 무대 울렁증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후자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멍석 위에 서면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생각. 이 생각이 입을 굳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스피치 동호회를 오래 참석하면서 직접 목격한 것은, 사람들은 멍석이 깔리면 평소보다 더 멋진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연단에 나가면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막상 거기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내지 못 스스로 수습 힘든  봉착한.  멍석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 이것을 꼭 알려주고 싶다.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을 멍석 위에서 해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해도 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개인적이면 개인적일수록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해왔다.


언젠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스피치를 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연사님들은 연단에 서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꺼내놨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내가 양보하겠단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랑에 대한 성찰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달랐다. 사랑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고등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고도 사랑에 대한 가장 따뜻한 스피치를 했다. 아주 사소하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요,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거든요. 학원에서 딱 처음에 봤는데 한눈에 뿅 해가지고요, 친해지려고 막 장난도 치고 그랬어요. 매일 그 친구 옆 자리에 앉으려고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몰래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가서 옆 자리에 앉았어요. 1, 2년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데 고백은 못했어요. 용기가 안나가지고요. 언젠가 정말 멋있게 고백하려고 마음만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애가 호주로 이민을 간다는 거예요. 저는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믿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야, 뻥치고 있네~' 하면서 속으로 '설마. 아닐 거야. 장난일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말 가버렸더라고요. 저는 그날 밤 혼자서 다음날 새벽까지 포도주스 1병을 마셨어요. 미성년자라 술은 못 마시니까요. 아직도 그 친구가 보고 싶고 꼭 다시 만나서 고백하고 싶어요.”


박수가 뜨겁게 터졌다. 남학생은 사랑이란 단어 한번 꺼내지 않았지만, 멋진 표현 하나 쓰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심이 담긴 호응을 얻었다. 특별할 줄 몰랐던 것. 꾸미지 못했던 것. 어른들에겐 모두 '결점'이라 불렸던 이런 단점들로 남학생은 가장 진솔하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말매무새가 깔끔하진 않았지만 그런 어눌한 말투마저 첫사랑의 풋풋함처럼 다정했다. 남학생을 보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발표는 '잘' 하거나 '멋있게' 하는 게 아니라 '진솔하게' 하는 것이란 걸. 사람들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가르침보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의 정의내림보다, '나는 그랬다'라는 말에 그저 '나도 그래'하고 공감하길 원한다는 것을. 사소한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공감의 힘이 깃들어있다.


몇 해 전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전시된 그림들을 보며 문득 이런 물음과 이런 대답을 혼자 나눠봤다. '만약에 저 그림들이 미술관 벽에 걸려있지 않고 어느 허름한 아파트 복도에 걸려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저렇게 멈춰 서서 감탄을 할까?'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저 그런 실력을 가진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이 미술관에 걸린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감상할까?' 그럴 것이다.  


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하고 개인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라도 일단 무대 위에서 말하는 순간 미술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들을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니 결론은,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멍석 위에서 하는 이상 모두 '작품'이 된다는 것과 그러니 자신감 있게 말하면 그만이란 것이다. 평상시에 그려본 적 없는 난해한 작품을 그리는 대신, 소박하고 일상적인 그림 하나 진심을 담아 그려내 미술관 벽에 걸어보는 것. 그것이 더 멋진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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