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사람은 일상을 노래한다
#16. 일상의 발견
: 말 잘하는 사람은 일상을 노래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중년의 한 연사님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여행을 하는 건 참 좋지요. 저도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여행했고요. 하지만 꼭 먼 데로 여행을 떠나고 다른 나라를 기행해야 여행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칸트인가? 옛 철학자 중에 누군가는 일생동안 여행을 하지 않았대요. 먼 곳으로 여행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죠. 왜냐면 자기는 매일매일 일상에서 여행을 했으니까요. 매일 집 근처로 산책을 하면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들꽃, 하늘, 나뭇가지, 참새들... 주변의 변화를 가만히 음미하면서 ‘이렇게도 날마다 새로운데!’하고 말했다지요. 저도 요즘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먼 곳으로 여행을 잘 안 다녀요. 대신 수시로 사진기를 목에 걸고 산책을 해요. 주변의 미물들을 찍어 보면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쳤던 게 새로운 의미로 저에게 다가오더라고요. 날마다 새로운 기분!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는 기분! 정말 낯선 곳으로 여행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죠.”
여행으로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말은 워낙 많이 들어서 의무감마저 들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일상을 여행한다'는 낯선 말은 내게 신선하고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연사님의 말처럼 한 번도 여행을 하지 않았던 철학자가 깊고 넓은 시야로 삶의 진리를 발견해내고 평생 철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에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을 관찰하고 거기서 길어 올린 사유도 꽤 쓸만한 것 아니었을까.
말을 잘하는 사람은 일상을 노래한다. 일상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고 진리를 담아낸다. 동호회에 20살 먹은 대학생이 있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그 스타일이란, 굉장히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날은 근황발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어제 학교에서 강의를 들었는데요. 제 양 옆으로 우리 과에서 제일 예쁜 두 여학생이 앉았어요. 왼쪽에 앉은 아이는 피부가 하얗고 귀엽게 생겨서 보호본능을 일으키고요, 오른쪽에 앉은 아이는 긴 생머리가 예뻐서 만화 속 여주인공 같은 이미지랄까? 아무튼 정말 죽을 뻔했어요. 심장이 두근거려서... 수업 내용이 귀에 안 들어오는 건 당연하고요. 마치 왕이 된 기분이었어요. 수업이고 뭐고, 그냥 누렸죠. 괜히 지적으로 보이려고 볼펜 한 번 굴려주고 무슨 말을 받아 적는지도 모르면서 필기하는 척 하고. 물론 한 마디도 못 나눴어요. 그런데 참 신기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있으면 그렇게 지루하던 수업시간도 아쉬울 정도로 빨리 끝나고, 교수님의 음성이 그렇게 달게 들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사랑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요.”
아무리 근황발표라지만 '어제 수업시간에 미인들 사이에 앉았다'는 소재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이야기가 그렇게 미소를 짓게 할 줄이야. 듣고 있으면 풉 하고 웃음이 새어나오는 이 사소한 일상 이야기가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근황발표를 할 때면 여행을 갔던 이야기, 친구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장을 찾은 이야기 등 일상에서 벗어났던 경험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남학생을 보면서 일상 중에서도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로도 충분히 몰입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구나, 알게 됐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는. 어쩌면 너무 반복적이라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일상을 이제부터는 가만히 관찰해보려 한다. 길을 걸어도 그냥 걷지 않기. 우리 동네 가로수가 겨울이 됐다고 짚으로 된 옷을 입었네, 그런 혼잣말 한 번쯤은 구시렁거려볼 생각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애정 어린 관심을 싹틔워볼 참이다. 매일의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일상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볼 참이다. 하얀 종이 위에 잔잔하고 소박한 시 한편을 쓰듯이, 일상에서 길어올린 작은 이야기 하나 들풀 건네듯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