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질병, 장비병

도전! 할머니의 플루티스트 되기 009.

by 황인희

오래전 이야기다. 음악계에서 전설처럼, 소문처럼 떠돌던, 그러나 제법 믿을 만한 소식통이 제공한 이야기다. 러시아였던가 확실치는 않지만 유럽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하는데 비행기 연결에 문제가 생겨 수화물로 부친 악기들이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외국 순회 공연하는 오케스트라의 일정이 여유로울 리도 없고 거액의 입장권은 오래전에 매진되어 날짜를 바꾸기도 어렵고 연주회 취소는 더더욱 안될 일.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도 곱뿌가 있어야 마신다’라는 말처럼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가 모인 오케스트라라도 악기 없이는 연주회를 할 수 없다. 궁여지책으로 우리나라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악기를 통째로 빌려서 연주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가진 악기들도 만만치 않은 명품들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연주회에 참여했던 사람들, 음악깨나 들어봤다는 사람들의 평가는 이랬다.

“똑같은 악기로 어떻게 그렇게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두 오케스트라의 수준 차이가 악기가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당연한 얘기다.

일을 하든 취미 생활을 하든 뭔가 도구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병은 바로 ‘장비병’이다. 악기 연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카메라 촬영을 하든가 테니스, 골프 등 개인 장비가 필요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장비병에 걸리기 쉽다. 나도 10여 년 전 처음 테니스를 배울 때 좋은 라켙을 사면 3개월 정도 레슨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 심리가 묘해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무 생각 없던 사람도 일단 혹하게 마련이다. 당시 한 달 레슨비는 15만 원. 석 달이면 45만 원인데 좋다는 라켙은 10만 원이다. 그럼 35만 원 이득 본다는 생각이 들면서 갈등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석 달 레슨 기간을 줄일 만큼 효과가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냥 ‘병’에 감염되었을 뿐이다. ‘장비병’. 장비병은 다양한 종목에 나타나며 면역력도 없고 재발, 또 재발한다. 유명한 중고 거래 사이트 ‘당근’에서는 장비병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제법 만날 수 있다. “왜 파세요?”라고 물으면 자신의 장비병 증세를 술술 펼쳐내는 사람도 있다.

“좋다고 해서 샀는데 생각한 것만큼 효과는 없어서 실망하던 중 더 상위 버전이 나왔다길래 그걸 샀거든요. 그래서 예전 건 아낌없이 처분….”


‘단언컨대 나는 장비병에 흔들릴 허황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절대 장비병에 걸리지 않을 탄탄한 멘탈과 실용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이것이 이때까지 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데 그것이 허물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20여 년 전 어린 딸을 위해 장만한 야마하 F100SII 플루트를 가지고 레슨받기 시작했다. 완전 초보자용 악기지만 이 악기로 배우기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앙상블 단원이 되어 어설프나마 무대에도 섰다.


물론 플루트에 다양한 등급이 있고 순금 플루트로 연주하는 사람이 있음도 알고 있다. 요즘은 웬만한 전공자는 금제 플루트로 연주한다. 그런데 그건 나와 멀리 떨어진 세상 사람들 얘기고 나는 그런 악기를 사용할 능력도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저 내 악기가 있음에 감사하고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연주자의 실력이지 악기 자체가 아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첫 연주회가 끝나고 한가해진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앙상블 단원이 내게 속삭였다.

“여기 단원 중 선생님과 나만 싼 악기를 쓰고 있네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B풋 악기잖아요.”


그날 나는 내가 쓰던 기종은 중급자 수준 악기에 비해 키가 하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나는 장비병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급은 아니더라도 완전한 형태의 악기를 갖고 싶었다. 내가 쓰던 야마하 F100SII 플루트. 100번대가 가장 싼 버전이고 200, 300, 400으로 올라갈수록 좋은 악기, 비싼 악기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F100SII는 낮은 C부터 시작되는데 ‘B풋’ 플루트는 그 아래 한 음(B)을 더 낼 수 있다. 헤드, 바디, 풋 중 풋에 키가 하나 더 있어 B풋이라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차이가 있지만 한도 끝도 없으니 거기서 스톱!


암튼 그래서 질렀다. 중고 악기가 거금 100만 원이 넘지만 인생 뭐 있느냐며, 내가 이 나이까지 아직도 뼈 빠지게 일하는데 이런 것도 못 사느냐며,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이런 걸 주저하느냐며, 사려면 하루라도 빨리 사서 한 번이라도 더 부는 게 남는 거라며, 골드도 아니고 실버 바디인데 까짓 거… 별별 합리화를 다 한 끝에 야마하481 중고 플루트를 샀다. 무엇보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난 이제 평생 이 악기로 연주할 거예요.”

내 말에 플루트 전공했다는 악기상 청년이 곧바로 반박한다.

“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아마 1년 후 다시 오셔서 그 위 버전 사시게 될 걸요.”


2년째 야마하481 플루트를 쓰고 있지만 앞으로도 절대 그 청년 말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에 돌아와 예전에 쓰던 악기를 곧바로 ‘당근’ 사이트에 올렸고 이틀만에 10만 원에 팔렸다. 나는 새 주인에게 받은 10만 원을 아직도 봉투째 간직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상위 버전 악기를 사게 될 ‘만일의 경우’에 보탤 요량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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