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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4. 2021

11. 말하라, 기억이여

기억이 나를 속이고 있다

기억은 경험과 상상의 조합물이다. 완벽히 객관적인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뚜렷해진다. 뚜렷해지는 경우는 보통 내가 기억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내겐 특이한 조합의 친구들이 있는데, 한 명은 기억을 거의 못하고 한 명은 기억을 과하게 한다. 기억을 과하게 하는 친구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잊은 거라고 믿으려고 하면서도, 친구가 없는 기억을 만들어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 친구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내가 해석기론 그 친구가 너무 친절해서 그렇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상대방이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기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면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지어낸 이야기를 당사자를 포함한 모두가 믿을 때다. 말도 안 되는 기억이 우리의 머릿속에 채색된 채 남는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속성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우리는 기억을 믿어도 되는 걸까?




<말하라, 기억이여>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강렬한 추억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렇게 재밌는 편은 아니어서 2장까지밖에 못 읽었다. 그래도 하나 건진 게 있다. 나보코프는 어린시절 프랑스인 가정교사와의 겨울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세히 묘사한다.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추억을 활용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실제인지, 아니면 소설을 쓰기 위해 덧붙인 내용과 혼재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억은 이렇듯 불완전하다. 기억이 만든 나는 진짜 내가 맞을까?

아주 어렸을 때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후였다. 엄마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나는 굉장한 충격에 휩싸였고, 엄마의 말을 믿었다. 내 밑에는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을 굉장히 미워하고 있었다. 당시는 나는 엄마가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집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집이었다. 마당 너머에 작은 하천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다리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그 다리에서 주워왔다고 믿게 됐다.

거실에 큰 창이 있었다. 큰 창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다리를 하염없이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내 속에 있던 어렴풋한 기억을 꺼냈다. 핑크색 패딩을 입은 남루한 차림의 여자가 갓난아이를 꼭 안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엄마가 여자의 모습을 살짝 말해줬었다.) 다리 밑에서 여자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나는 12월생이다.) 여자는 굶주려 있다. 아기를 꼭 안고 쳐다보다가 여자는 결심한 듯이 아이를 다리 밑 기둥에다 놓는다. 그리고 결심한듯 아이에게 뒷모습을 보인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여자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한번 뒤돌아 본다. 그러나 입술을 꽉 다물고 결연히 고개를 돌린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키울 수 없어.' 내가 어렸을 때 상상했던 버려지는 순간이다.

그날 밤 내가 짐을 싸고 친엄마를 찾으려 떠나려 하자, 아빠가 막아 섰다. 아빠는 엄마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말해줬다. 엄마는 옆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남동생을 안은 채로. 나는 내 기억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다. 나는 아빠를 피해 나가면서 말했던 것 같다. 친엄마 얼굴이 기억난다고. 그제야 엄마는 내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엄마는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말을 너무 안 들어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우리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때 나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후 텔레비전에서 엄마들이 나와 자신의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면서, 아이가 기억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지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며, 아이들이 기억을 확신하는 일은 더 쉽다.

한동안 내 머릿속의 친엄마를 잊고 살았다. 다시 기억이 난 것은 2017년 겨울이었다. 서울에서 동생과 자취를 하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에는 밤만 되면 노숙자들이 몰려왔다. 대부분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남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핑크색 옷에 핑크색 캐리어를 들고 있는 여자가 나타났다. 하필이면 내가 나가는 출입구 밑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의 눈빛은 불안했다. 집을 나온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그 여자를 보고 나는 내 머릿속에 친엄마를 떠올렸다. 물론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괜히 눈길이 갔다. 다름 아닌, 내가 지어낸 그 기억 때문에.

여자는 저녁에 나타났다가 아침에는 사라졌다. 학교를 가면서 빈 자리를 볼 때면 여자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에스컬레이터 기둥 뒤에 있는 여자의 캐리어를 발견했다. 여자는 짐을 그 자리에 숨겨두고 낮이 되면 사라졌다. 일을 가나 싶었다. 한번은 아침에 마주쳤다. 김이 올라오는 새우탕을 먹고 있었다. 한 달을 그렇게 지켜봤던 것 같다. 갈수록 여자는 지저분해 졌다. 핑크색 패딩에 낀 검은 때가 점점 진해지더나, 얼굴도 갈수록 어두워졌다. 눈이 오던 날, 나는 계단을 오르다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렇게나 추운데 밤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했나 보다.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 괜한 오지랖이고, 과한 동정이고 자만심이며, 내가 미친 거라는 걸. 나는 속으로 다짐하 듯이 생각했던 것 같다. '너가 저 여자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돈을 줄 수 있어, 뭘 줄 수 있어. 한번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엔? 무책임한 동정심은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거니?' 그러면서도 상상했다. 여자에게 손길을 내미는 내 모습을. 근처 찜질방에 갈 수 있는 돈을 주거나, 우리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물에 씼을 수 있게 하고 따뜻한 밥을 주는 내 모습을. 물론 나는 겁이 많아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거짓된 기억이라도, 잘못된 기억이라도, 내가 믿는다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적이 있다. 내가 동생을 괴롭히자 엄마는 나보고 나가라고 했다. 나는 결연한 몸짓으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이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친엄마에게 얼굴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등돌리고 걸어가는 장면과 겹친다. 나는 겁이 났지만 집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떠나려고 했다. 갈대 숲으로 갔던 것 같다. 나는 갈대 숲 사이에서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 그 모습이랑 비슷할까? 나는 갈대숲 입구에서 서성인다. 무서워서 안으로 들어가진 못한다. 엄마랑 이보다 더 멀어지면 진짜로 길을 잃을까봐 두렵다. 나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 이 기억을 떠올렸다. 엄마는 내가 자꾸 잠든 동생을 깨우자 화가 나서 나보고 집을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나갈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내 딴에는 멀리 갔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집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집이 보이는 들판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는 소리다.

진실을 말해볼까? 우리 집 앞에는 갈대 숲이 없다. 그러니까 내 가출의 추억은 내가 만들어 낸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갈대숲의 장면은 내가 과거에 찍힌 사진을 보고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느끼니. 그래서 할아버지가 된 나보코프가 기억에게 말하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는 기억을 믿을 수 없으니, 기억 네가 정확히 말해보라고.



나는 얼마 전 면접을 보면서 내 기억이 잘못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취업 컨설턴트들은 취준생들에게 사소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말한다. 자소서는 나의 경험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수단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면접을 볼 때 나는 내가 자소서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소서 속의 나는 실제의 나와 달랐다. 나는 자소서에처럼 위대한 당위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다 3번째 면접이었나? 나는 내가 자소서에 동화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마치 자소서 속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게 내 진짜 정체성이 맞나? 내가 맞나? 취준을 하면 할수록 기억이 덧붙여지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낀다. 그래서 말해본다. "말하라, 기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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