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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6. 2021

18. 정체성(3)

영화 <나쁜 피>를 보고 상상해본다

“남자 주인공은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춤을 추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의 몸짓이 춤보다는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나오는 남자의 내레이션이 몸부림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사랑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의 나지막한 대사는 그의 춤이 사랑을 거부하는 몸짓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이 찾아온 사랑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녀를 사랑하게 된 자신은 그가 원하던 정체성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카메라 렌즈는 그러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남자를 집요하게 쫓아간다. 카메라의 렌즈는 사회의 시선이며, 그것이 우리를 만드는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만들어진다.”
 
이번 학기 나는 ‘몸과 문화’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위의 글은 감상문의 일부다. 나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그럴듯한 말들을 그럴듯하게 엮었다. 이 수업은 교수님이 선정한 영화나 소설을 감상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번 토론의 발제자가 아니어서 다행히도 이 난해한 영화에 대한 토론을 피해갈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 발제자가 나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 순간을 춤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감독은 사랑에 빠진 마법 같은 순간을 마법 같은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에 확신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 뭔가를 건드렸다.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손을 들고 발제자의 의견에 반박했다. 다소 사납게 말했던 것 같다. 발제자인 여자애가 창백해진 것을 보면 그렇다. 교수님이 중재자로 나서고 나서야 나는 공격을 그만뒀다.
 
수업이 끝나고 괜히 나선 것 아닌가 하는 후회가 몰려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여자애를 쫓아가서 그럴 생각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해석이란 자의적인 것이고, 그래서 본 사람 만큼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예술작품을 만든 창작자가 직접 나서서 장면을 해설해줘도,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수용자 아니던가. 그때 여자애가 내 앞을 지나갔다. 토론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봤다. 여자애의 얼굴이 뭔가 익숙했던 것이다. 나는 카톡 프로필을 쭉 넘기다가 아차 싶었다. 내 전남친의 여자 친구였던 것이다. 전남친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항상 생각해온 터였다. 물론 나는 전남친한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라도 여자애가 자기 남자친구한테 오늘 있던 속상한 일을 얘기하다가 사나운 공격자가 나라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주 난감하군.
 
나는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애써 내쫓으며 길을 걸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전남친과 그의 여자친구가 서있었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무심함을 가장한 채 걸어갔다. 그러다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애는 나를 보더니 인사말도 없이 씩 웃어보였다. 여자애도 남자친구의 분산된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당황해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만약 여자애가 내 얘기를 한다면 남자애는 내가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야. 넌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차인거야.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지칠 때쯤 멈춰 섰다. 그 커플로부터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둘의 시선이 내 주변에 계속 머무는 느낌이었다. 그 떠벌이가 친구한테 말한다면 시선들은 무한대로 늘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시선이 존재한다. 내 시선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어서, 나의 외침은 나의 정체성과는 무관하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카톡이 울렸다. “자니?” 전남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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