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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10. 2021

24. 자소서 특강

골방의 취업 컨설턴트가 말한다.

※믿지마시오.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디테일이다.”


소설 <롤리타>의 작가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한 말이다. 정확히는 <어둠 속의 웃음소리>라는 작품을 독일에서 발간되던 러시아문학 잡지에 연재한 뒤, 책으로 발간하면서 소설 맨 앞에 추가한 내용이다. <롤리타>의 주인공인 험버트의 삶은 요약하자면 네 문장으로 충분하다. ‘그는 태어나서,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끝내 그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고, 그 사실을 알고 절망하며 죽어갔다.’ 요약된 삶은 비슷하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말한다. 우리 삶을 가치 있어 보이게 하는 것은 결국에 디테일이 아닌가!     


이 점을 명심하고 자소서를 써보자. 디테일을 강조했던 만큼 회사도 구체적으로 잡아보겠다. 최근 경제지에서 대한민국 닭 왕국을 거느리고 있는 닭고기 전문 업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애완견 시장이 커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최근 애완견을 위한 식품제조 사업에도 뛰어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물을 대량으로 도축하면서 동물의 복지를 생각하는 회사라니. 우리가 찾던 공명정대한 회사의 표본 아닌가!     


질문지를 보자. ‘당신을 변화시킨 경험을 말해보라.’ 디테일을 따지기 전에 큰 틀부터 정해놓고 가자. 이미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1회 수업료가 30만원인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작은 것 하나라도 짚고 넘어가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이었던 내가 어떤 경험을 통해 위대한 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깨달은 진리를 단번에 깨닫고는 그것만으로 모자라 그 위대한 가치를 몸소 실천해 보이며 위대한 나로 새롭게 탄생한 이야기를 쓰면 된다. 장난치는 거 아니냐고?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그대는 이제 막 자소서를 쓰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니 너그럽게 넘어가주겠다. 결국엔 알게 될 테니.     


자, 이제부터 진짜다. 나의 자소서를 어떻게 꾸며야 할까? 먼저 회사의 성향을 파악해야한다. 내가 택한 회사는 동물 없이는 못 사는 회사였다. 바로 결론. 받아 적으시길. “나는 동물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동물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겠는가? 눈알을 굴리는 당신, 설마 자기에게 관련된 경험이 있는지 머릿속을 뒤지고 있는 건 아니길 바란다. 자소서를 쓰면서 진솔한 경험담을 쓰려는 것은 취직 보이콧 선언과 다름없다. 진솔한 경험담은 자신을 신문지로 포장하는 것과 같다.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예쁜 포장 박스와 그에 걸맞은 예쁜 쇼핑백이다. 붓을 들고 신문지를 꾸미자. 그 속이 보이지 않게.     


추상적으로만 말해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최근 이런 기사를 봤다. 도축장에 끌려갔던 소가 겁을 먹고 도축장을 탈출했다고 한다. 다행히 소는 어떤 동물 애호가의 마당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동물 애호가가 소를 쫓아온 도축업자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소는 드넓은 평원에 보내져 늙어 죽을 때까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라 믿는다. 이제 내가 그 동물 애호가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소를 키운다. 소의 눈망울을 보고만 것이다! 그 맑은 눈망울을. 당시 나는 열 살이었다. 우리 집은 시골에 있었고 농사를 지었다. 이제부터는 영화 <워낭소리>를 가져온다. 소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소 이름은 프랭크고, 프랭크 때문에 나는 농부가 꿈이었다. 프랭크가 죽기 전까지는.


나는 18살이 되던 해에 수의사에게 프랭크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듣는다. 그날 밤 나는 프랭크의 옆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프랭크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쓰다듬으며 나는 도저히 프랭크를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을 닦고 생애 다신 없을 결심을 했다. 프랭크를 먹어야 겠다! 다음날 나는 프랭크를 도축장으로 손수 보낸다. 그리고 프랭크의 안심, 등심, 채끝은 구워 먹고, 우둔, 설도는 육포로 말려 먹고, 갈비는 찜으로 해 먹고, 양지로는 장조림을 만들고, 사태로는 김치찌개를 해먹었다. 프랭크는 그렇게 나와 하나가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는 프랭크를 사랑하기에 먹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진짜 중요하다.


내가 이 사건에 덧붙여야할 디테일들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겠다. 첫 번째, 프랭크 덕분에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동물의 고통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번째, 저명한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말을 인용한다. 마지막 세 번째, 동물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한다. 너무 동물을 사랑한다고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글 솜씨만 있다면 내가 프랭크를 먹을 수밖에 없던 상황을 아름답게 꾸며 말해도 좋다.  

   

자소서 때문에 고민하는 취준생들은 이제 감 좀 잡히는지. 내가 이런 강연을 하는 이유는 내게 꿈이 있어서다. 한 회사에 썰이 많은 취준생과 썰이 없는 취준생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 지독한 면접관들이 특별한 경험을 말하라 다그치며 그 경험만으로 취준생을 평가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그런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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